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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탐방/한국인물 韓國人物

사회시민운동가 함석헌 咸錫憲

by 경청 2024. 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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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선생

 

함석헌(咸錫憲, 1901년 3월 13일 ~ 1989년 2월 4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종교인, 언론인, 출판인, 기독교운동가, 그리고 인권 및 민주화 운동가로서 현대 한국사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입니다. 그의 호는 신천(信天), 씨알, 바보새로, 다양한 사상적 입장과 운동 활동을 통해 '한국의 간디'로도 불렸습니다. 함석헌은 일생 동안 비폭력 운동과 인권 운동에 힘썼으며, 종교적 신념과 사회적 책임을 결합하여 한국의 현대 정치사와 시민사회에 깊은 자취를 남겼습니다.

함석헌의 초기 생애와 교육

함석헌은 190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가문은 학문을 중시하는 집안으로, 어린 시절 당숙 함일형이 세운 한학 서당인 삼천재에서 한학을 수학하며 기초적인 학문적 소양을 쌓았습니다. 이후 덕일소학교를 수료한 뒤 양시공립소학교를 졸업하고,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게 됩니다. 이 시기는 함석헌이 처음으로 독립운동에 눈을 뜨게 된 중요한 시기입니다.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하면서 그는 본격적으로 사회적 참여와 저항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고, 이로 인해 학교에서 퇴학당하기도 했습니다. 퇴학 후에도 그는 교육과 사회운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1921년 정주 오산학교에 입학하여 학문을 계속하였고, 이곳에서 그는 평생의 스승인 류영모를 만나게 됩니다. 류영모는 함석헌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으며, 그로 인해 함석헌은 민족주의와 실력양성론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함석헌은 후에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으로 돌아서게 되었으며, 이는 그의 평생 사상에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일본 유학과 무교회주의의 영향

1924년, 함석헌은 일본 도쿄 고등사범학교에 진학하여 역사를 공부했습니다. 이 시기 그는 일본의 대표적인 무교회주의 신학자인 우치무라 간조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우치무라 간조는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하지만 조직 교회에 의존하지 않는 무교회주의를 주장했으며, 함석헌은 이러한 신앙적 자유와 자율성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무교회주의 신앙클럽을 결성하고,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무교회주의 운동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1927년, 그는 동인지 《성서조선》 창간에 참여하며 본격적인 문필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 잡지는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 사회적, 정치적 논의를 담아내며 일제강점기 한국의 지식인들과 독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함석헌은 이 시기 역사와 신앙에 대한 깊이 있는 글을 쓰기 시작했으며, 특히 그의 대표작인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한국의 역사와 민족의 운명을 신앙적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중요한 작업이었습니다.

해방 전후의 활동과 독립운동

함석헌은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활동을 지속하며 독립운동에 기여했습니다. 그는 오산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며 학생들을 가르쳤고, 동시에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는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1940년에는 계우회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년간 투옥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그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지만, 동시에 그의 신념을 더욱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광복 후, 함석헌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당국에 의해 신의주 학생시위의 배후로 지목되어 투옥되었다가 소련군에 의해 풀려났습니다. 1947년에는 월남하여 남한에서 활동을 시작했으며, 이후 그는 비폭력 저항 운동과 인권운동에 매진하게 됩니다.

비폭력 운동과 민주화 운동

해방 후 함석헌은 남한에서 비폭력 인권 운동과 민주화 운동을 활발히 전개했습니다. 특히 그는 장준하와 함께 1956년 《사상계》에 참여하여 정치와 사회에 대한 비평을 전개했으며, 1958년에는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견해를 발표하여 대한민국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활동은 그를 정부와 충돌하게 만들었으며, 결국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감되기도 했습니다. 함석헌의 민주화 운동은 단순한 정치적 비판을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사회적 불의에 대한 저항을 종교적 신념과 결합시켜, 비폭력 저항 운동을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활동은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특히 젊은이들에게 비폭력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전파하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사상과 철학: 씨알 사상과 비폭력주의

함석헌은 그의 종교적 신념과 사회적 실천을 결합하여 '씨알 사상'을 주창했습니다. 씨알 사상은 개인이 민중 속에서 자기 존재를 자각하고, 비폭력과 평화를 바탕으로 사회적 변화를 이루어 나가야 한다는 철학입니다. '씨알'은 작은 씨앗이라는 의미로, 민중 개개인이 비록 작은 존재일지라도 그들이 깨어나고 힘을 모으면 거대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함석헌의 신념을 상징합니다. 함석헌은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는 국가나 민족이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억압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때, 그것은 개인에게 재앙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견해는 특히 남북 분단 상황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는 남북 통일이 단순한 정치적 통합이 아닌, 진정한 민중의 통일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국가주의적 통일을 비판했습니다. 비폭력주의는 함석헌 사상의 핵심입니다. 그는 폭력과 전쟁을 통해서는 진정한 평화와 정의를 이룰 수 없다고 믿었으며, 오직 비폭력적 수단을 통해서만 사회적 변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간디의 사상과도 많은 유사점을 지니며, 함석헌은 종종 '한국의 간디'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후반기 활동과 유신 독재에 대한 저항

1970년대 들어 함석헌은 박정희 정권의 유신 독재에 강하게 저항했습니다. 그는 월간 잡지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여 정치, 사회적 비평을 계속하였으며, 이를 통해 민중 계몽 운동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그의 활동은 정권의 탄압을 받았고, 《씨알의 소리》는 1980년 강제 폐간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석헌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으며, 민주화 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함석헌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투쟁을 이어갔습니다. 그는 민주쟁취 국민운동본부의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비폭력 민주화 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그의 이러한 활동은 후에 대한민국의 민주화에 큰 기여를 하게 됩니다.

사후 평가와 유산

함석헌은 1989년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별세하였으며, 그의 장례식은 많은 이들이 참여한 가운데 치러졌습니다. 그의 유해는 대전 현충원에 안치되었으며, 이후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어 건국포장을 수훈받았습니다. 함석헌의 사상과 철학은 그의 생애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까지도 그가 남긴 유산은 한국 사회에 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의 '씨알 사상'과 비폭력 저항 운동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으며, 그의 저서와 강연들은 현재도 널리 읽히고 있습니다. 또한 함석헌은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 인권 운동가로서, 한국 사회에 종교적 가치와 사회적 책임의 중요성을 일깨운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함석헌은 단순한 종교인이나 언론인이 아닌, 자신의 신념과 사상을 바탕으로 한 행동하는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는 비폭력과 평화를 바탕으로 한 민주주의와 인권 운동을 펼쳤으며, 이를 통해 한국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의 사상과 철학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현대 한국의 인권 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중요한 토대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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