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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이야기

김해김씨4 - 꿈바다에서 태어난 충절의 무장, 김완 장군

by 경청 2024.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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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 장군 초상화
九皐祠, 1981년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구고사는 원래 김완의 충절을 추모하는 사우로 1640년(인조 18) 창건하였으나 뒤에 문중 선조인 김진문(金振門), 조카인 김여준(金汝峻, 1616∼1659), 김여옥(金汝沃, 1641∼1686)을 합향하게 되었다. 1889년(고종 22) 불에 탄 뒤 1946년 향내 유림의 발의로 중건하였다. 1979년과 1983년에 고쳤다. 부조묘는 김완의 신위를 모시고 제향하며 김완 초상(보물, 2000년 지정)을 모신 영당이 있다.
영암 구고사 및 김완장군 부조묘 전경

1.  김완장군 관련 기록 (전체 줄거리)

김완(金完) 장군은 선조 10년 1577년(乙丑) 8월 23일 영암군 서호면 몽해리 899번지에서 학천군(鶴川君) 휘(諱) 극조(克 )와 모부인(母夫人) 천안 전씨(全氏) 사이에서 장자로 태어났다. 전부인이 맹호가 품속으로 들어오고 또한 영암만 바닷물이 그의 치맛폭으로 몰려드는 상서로운 꿈을 꾸고 임신했으며 출생 할 때는 흰 기운이 방안에 가득했다가 하루가 지난후에야 흩어지니 사람들이 모두들 이상하게 여겼었다. 차차 자람에 기골이 웅위하고 여력이 다른사람과 달리 출중하여 크나큰 솥도 불끈불끈 드는 힘이 있었다. 또한 재주와 지략이 뛰어나서 활쏘기와 말타기도 뛰어 났었다.

장군과 몽해

군서면 서구림을 지나 학산 방향으로 4㎞를 달리다 보면 서호면 화송리 화소가 나온다. 이 마을에서 1.5㎞ 떨어져 바라보이는 곳에 몽해(夢海)라는 마을이 있다. 옛날 이곳은 ``구음평``(九音坪) 또는 ``꿈바다`` 등으로 불렀다. 지금은 들이 되었지만 얼마전 까지도 영암만 바닷물이 넘실거렸다. 이곳을 ``꿈바다``라 부르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400여년 전에 김완 장군이 태어난 전설 때문이다. 김완 장군의 어머니 천안전씨는 김완을 임신할 때 영암만 바닷물이 그의 치마폭으로 몰려드는 꿈을 꾸었다. 이 때문에 ``꿈바다``가 된 것이다. 화소는 지형전설에 알맞게 마치 학이 알을 품고 있듯 높이 3m, 넓이 10평 가량의 알섬 7개가 마을 앞 500m거리 가운데에 150m 간격으로 있었으나 1973년 경지정리 때 모두 없어지고 한 개만 남아 있다.

김완은 그의 나이 15세때 아버지가 억울하게 옥사하는 일을 당했다. 그의 아버지 극조는 무과에 급제해 만호(萬戶)를 거쳐 광양 현감을 지낼 때 왜구의 침노가 있을 것을 예견하고 군인을 모병해 훈련을 시키다가 1590년 이성(利城) 현감으로 옮아가 있었다. 그후 후임으로 광양 현감이 된 한덕수는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동인(東人) 이 발 일당이 숙청당하자 서인(西人)에 아부하기 위해 ``김극조도 이 발과 더불어 난을 일으키기 위해 광양에 군대를 모아 조련한 사실이 있다``고 거짓 모함을 했다. 조정에서는 즉시 김극조를 가두고 모진 고문을 가했으나 사실과 다름이 판명되었다. 그러나 출옥전인 1591년 3월 12일 옥사하고 말았다.

15세의 김완은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의 시신을 모시고 몽해에서 2㎞ 떨어진 서호면 엄길리에 이르렀다. 이 때 호랑이가 앞을 가로막고 호소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니 호통을 쳐서 길을 비키라고 했으나 듣지 않은 지라 자세히 살핀 즉 목에 사람의 뼈가 걸려 있었다. 김완이 입을 벌리고 뼈를 꺼내 주니 고개를 숙이고 감사의 뜻을 표하고 그의 옷자락을 물고 그를 인도하는 지라 이상히 여겨 따라갔다. 20리길을 북행해 매월리에 이르러 주룡진(注龍津)이 내려다 보이는 산에 올라 앞발로 땅을 후비는 게 아닌가. 그곳에서 바라보니 명당이라 그의 아버지 시신을 모셨다. 오늘날 이 묘터를 ``갈용음수(渴龍飮水) 터`` 라고 부르며 이 묘앞에 대리석 비석을 세웠는데 근대에 비석에 까맣게 끼어 있던 바위옷이 저절로 벗겨져 흰빛을 내는 지라 ``김문(金門)``에 길조가 비칠 징조``라고 들 한다.

김완장군 강덕유허비문

영암군 서호면에 몽해란 마을이 있었는데 당나라에 장가정이 살던 마을과 같이 말방울 소리와 벽제 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인조 갑자년(1624년) 역적 이괄과 한명련 등은 변방을 지키던 장수들로 북방 오랑캐의 침범을 방위하던 부대의 부대장이었으나 하늘을 향하여 활을 쏜 흉한으로 도사를 죽이고 역적으로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에 역도들을 섬멸하고 태산이 닳고 황하가 마르도록 빛나는 공을 세우신 양무공이 이곳에서 태어 낳으시고 자라신 땅이다. 아! 거룩하도다. 공명과 훈업이 백세토록 빛나고 후세 사람들이 높이 우러러 보고 또한 극진하게 추모하게 되니 사람으로 말미암아 지령이 걸출하는 것인가 아니면 지령으로 말미암아 인걸이 나는 것일까?

현산(峴山)은 산이 낮고 적으나 진나라 양우(羊祐)가 이곳에서 자주 노닐고 구경함으로써 천하에 이름났고 호주(湖州)는 땅이 벽소하나 당나라 한유(韓愈)가 귀양살이를 함으로써 후세에 까지 일컬어 전해졌으니 세상에 이러한 점을 미루어 보건데 사람이 걸출함으로써 그곳이 지령하는 것이지 그 지령이 영특하여 인걸이 낳는 것이 아님을 밝게 알겠도다. 오직 이곳 영암은 우리나라 남쪽에 비록 편벽하게 처해 있으나 월출산이 웅장하고 골골이 깊어 산이 아름답고 물 또한 맑으며 서호강의 비단결 같은 강물이 흘러있어 그 깊고 맑음이 양양하고 토지 또한 비옥하고 물 맛이 달 뿐만 아니라 화사한 곳이다. 가히 성인과 달사(達士)가 나와서 성장하고 이양( 養)할 만한 곳이다. 천지가 조탄하고 수억만년을 지내오면서 태고때의 빛이 완연하고 창창하여 변하지 않았다. 마치 때를 기다려 왔음인지 이땅에 영걸이 나와셔서 청사(靑史)에 자상하게 실려 있다. 모든 기록에 갖추어 나타나 있으니 공의 휘는 완(完)이요, 자는 자구(子具)이시다.

가락국 수로왕의 후예로 고려때 감무공 휘 익경을 족보에 수조(首祖)로 모시고 선세에 이곳으로 이사하여 공까지 4세에 이르렀으니 증조의 휘는 한성(漢城)으로 증 좌통례요조의 휘는 사종(嗣宗)이시니 증 공조참의 이시고 아버지의 휘는 극조 이시니 이성현감을 지내신 증 병조판서 학천군 이시며 어머니는 천안전씨로 증 정부인(貞夫人)이시니 3대가 다 귀해 지심으로 인하여 추증(追贈)되셨다.

정부인이 공을 잉태하실 때 태몽이 있으셨으니 사나운 범이 품안으로 들어오는 상서로운 꿈을 꾸시고 이내 선조 10년 정축(1577년) 8월 23일 하늘에서 덕을 내리시사 이땅에 태어나시니 흰빛의 기체가 방안에 가득하다가 여러날이 지난후에 흩어지므로 마을 사람들이 다 이상하게 여겼다. 차차 자람에 기골이 웅위하고 여력이 다른 사람과 달리 출중하여 크나큰 솥도 불끈 블끈 드는 힘이 있었다. 또한 재주와 지략이 뛰어나서 활쏘기와 말 타기도 뛰어났었다. 아버지 현감공께서 광양 현감으로 계실 때 이발이 모역하여 옥사한 사건이 있었던 바 한덕수가 이발과 현감공이 연척이 됨을 알고 몰래 도사 정설 등과 함게 공모하여 현감공과 이발이 서로 내통이 있었다고 무고를 함으로써 현감공이 잡혀가 신문을 받았으나 아무 혐의가 없음이 밝혀졌다.

도리어 한덕수 등이 무고에 연루되어 그 추종배 7인은 법의 심판을 받아 다 죽었으나 오직 한덕수와 정설 등은 죽음을 면제 받았다. 현감공은 사죄의 은전을 받았으나 미처 출옥하지 못하고 옥중에서 졸 하시었다. 그때 공의 나이 겨우 열 다섯 살로 그 원수를 갚기를 맹세하고 상을 치르셨다. 정유년 무과에 합격하고 남원 구례 곡성 등지에서 왜적들과 싸워 크게 이긴 후 서울 명례동에서 한덕수에게 복수의 화살을 날렸으나 아버지의 원수를 갚지 못하여 죽는 날까지 한으로 삼았다.

이괄의 난에 토벌 선봉장으로 출전하여 크게 이기고 적을 섬멸하여 진무삼등훈에 책록되고 가의대부로 일품계를 가자하고 학성군에 봉해졌다. 아! 공의 그 장엄한 위업의 자취를 이 짧은 비석에 어찌 만분의 일이라도 샛길 수 있으리요.
기린에 영정을 모시게 하고 금궤철권을 받으셨으며 역사에 영원토록 자상하게 기록되었다. 인조 갑술년(1634년)에 가의대부 훈련도정과 황해병사겸 황주목사를 지내시고 잠시 짬을 얻어 집에 가겠다 하니 인조대왕께서 주연을 베풀어 주며 궤장을 하사 하셨다.

아! 슬프도다. 인조 을해(1635년) 2월 2일 화소 정침에서 돌아가시시 나라에서 부음을 들으시고 예관을 보내어 치제케 하고 병조판서를 증 하시고 시호를 양무라 하셨으며 부조묘를 명하셨다또한 관에 영을 내려 장구(葬具)와 제비(諸費)를 부담토록 하고 해남에 장사하였다가 그후 숙종 무술년에 영암군 북쪽 시종면 만수리에 이장하셨다. 배위는 영암최씨 복겸의 따님을 초취하시어 가의대부 함경북도 병마수군절도사 여수(汝水)를 낳으셨고 재취이신 청송심씨 동지 언겸의 따님에서 충의위(忠義衛) 여하(汝河)와 여해, 여현, 여선, 여서, 여호, 여담, 여국, 여관, 여람, 여금을 낳으셨고 딸은 군수 유흘연을 맞아 시집갔다.

손자는 가의대부 함경남도 병마수군절도사 학림군 세기(世器)외에 는 번다하여 다 기록하지 아니한다. 아! 전(傳)해 이르기를 군자의 유택이라도 오세가 지나면 다 깍여 진다 하였으니 비록 그 덕이 있으나 오래되면 잊기쉬운 것이 세상 인심인지라 공의 종손 영암군수 철호가 공이 나시고 자란 터에 오래도록 무징함을 두렵게 여겨 모든 후손들과 의논하여 이에 기록하여 세우기로 결의하고 금년 가을에 유허지이 이곳에 비를 세우니 그 일가중 에서도 뛰어난 유적보존회장 재호가 그 사업을 주관하면서 준섭에게 그 비문을 청 함으로 공을 크게 우러른바 지극하였으므로 감히 참람됨을 잊고 장군이 출생하시고 자란 명지임을 위와 같이 기록하여 꽃 다움을 밝혀 천백년후에라도 잊지 않고 보게 하니 영걸스런 터의 고사가 영원토록 빛이 나리라.  출처 : 영암신문(http://www.yasinmoon.com)

 

2.  김완장군 관련 기록 (시대순 요약 )

 

1. 출생과 성장 (1577년~1591년)

  • 출생의 배경: 김완(金完) 장군은 조선 선조 10년(1577년) 8월 23일, 전라남도 영암군 서호면 몽해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가락국 수로왕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광양 현감과 병조판서를 지낸 김극조(金克祚), 어머니는 천안 전씨(全氏)였다. 그의 가문은 충과 효를 중시하는 전통을 이어온 명문이었다.
  • 상서로운 태몽과 탄생: 김완의 어머니는 꿈속에서 영암만의 바닷물이 치맛자락으로 몰려드는 태몽을 꾸었으며, 이로 인해 그가 태어난 마을은 ‘몽해(夢海)’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김완이 태어날 때 방 안에 흰 기운이 가득 차 며칠 동안 사라지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다. 이러한 전설은 김완이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임을 예견한 것으로 여겨졌다.
  • 어린 시절의 재능: 김완은 기골이 장대하고 기개가 출중했으며, 활쏘기와 말타기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또한, 그는 커다란 솥을 번쩍 들어 올릴 정도로 힘이 강했다고 전해진다. 이런 비범한 기질 덕분에 주변에서는 일찍부터 신동이라 불렸다.

2. 청소년기의 비극과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 (1591년)

  • 아버지의 억울한 옥사: 김완이 15세 되던 해인 1591년(선조 24년), 그의 아버지 김극조는 정여립 모반 사건의 여파로 서인 세력에 의해 억울하게 옥사했다. 당시 김극조는 광양 현감으로 재직하며 왜구의 침입을 대비해 군사를 훈련시키는 충직한 관료였다. 하지만 정치적 모함에 휘말려 무고함이 밝혀졌음에도 옥중에서 생을 마감했다.
  • 장례와 호랑이 전설: 김완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시신을 모시고 장례를 준비하던 중, 호랑이가 앞길을 막았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자세히 살펴보니 호랑이의 목에 뼈가 걸려 있어 이를 꺼내주었고, 호랑이는 감사의 표시로 김완의 앞길을 인도했다. 호랑이가 안내한 명당자리에 아버지를 묻은 이 이야기는 후대에 '갈용음수(渴龍飮水)' 명당 전설로 남았다.

3. 무과 급제와 초기 군사 활동 (1597년~1598년)

  • 무과 급제와 군문 입문: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김완은 무과에 급제하며 경상도 방어사로 임명되었다. 당시 21세였던 그는 젊은 나이에도 뛰어난 용맹과 지휘력으로 주목받았다.
  • 정유재란에서의 활약: 남원, 구례, 곡성 등지에서 왜적과 싸우며 대승을 거둔 김완은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는 전술로 적을 물리쳤다. 그의 이름은 전국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젊은 나이에 이미 조선의 중요한 군사 인물로 인정받게 되었다.

4. 이괄의 난 진압과 공훈 (1624년)

  • 반란 진압: 1624년(인조 2년), 이괄의 난이 발발하자 김완은 조정의 명령으로 선봉장에 임명되어 반란군을 진압했다. 그의 뛰어난 전략과 리더십 덕분에 반란의 중심 세력을 섬멸하는 데 성공했다.
  • 진무공신 책록: 이괄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김완은 ‘진무공신(振武功臣)’에 책록되었고, 가의대부(嘉義大夫)와 함께 학성군(鶴城君)이라는 작위를 하사받았다. 이는 그의 생애에서 가장 빛나는 업적 중 하나로 기록되며, 조선의 충신과 무장으로서 그의 이름이 역사에 길이 남게 되었다.

5. 만년의 공직과 사망 (1634년~1635년)

  • 공직 생활: 만년에 김완은 훈련도정(訓鍊都正)과 황해병사 겸 황주목사로 근무하며 국가의 북방 방위를 책임졌다. 그는 조선의 안보를 위해 헌신하며 노년에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 죽음과 조정의 애도: 1635년(인조 13년) 2월 2일, 김완은 고향인 전라남도 영암군 서호면 화소리 정침에서 향년 59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에 조정은 깊은 애도를 표하며 병조판서로 추증하고, 시호를 ‘양무(襄武)’로 내렸다. 또한, 부조묘 건립과 장례 비용 지원을 명령하며 그를 기렸다.

6. 묘소와 유적의 형성 및 보존 (1635년 이후)

  • 초기 장례와 이장: 김완의 묘는 처음 해남에 마련되었으나, 1718년(숙종 44년) 영암군 시종면 만수리로 이장되었다. 이때 신도비가 세워졌고, 묘역은 후대에 걸쳐 보존되었다.
  • 준마총의 전설: 김완이 아끼던 애마가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뒤따라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준마의 무덤인 ‘준마총’이 묘역에 포함되어 있다.
  • 현대적 보수: 김완의 묘와 유적은 1979년 이후 여러 차례 보수되었으며, 1981년 전라남도 기념물 제40호로 지정되었다.

7. 후손들의 기념 사업 및 유적 정비 (1887년~현재)

  • 유허비 건립: 1887년(고종 24년), 후손들과 지역 주민들이 구례군에 유허비를 건립하여 김완의 업적을 기렸다. 이 유허비는 이후 현재 위치로 옮겨져 보호되고 있다.
  • 구고사(九皐祠): 김완 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640년에 처음 건립된 사당으로, 이후 여러 차례 보수되었다. 현재는 지역 사회의 중요한 역사적 장소로 자리 잡고 있다.
  • 초상화와 문화재 지정: 김완 장군의 초상화는 1625년 인조가 직접 하사한 진영으로,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이 초상화는 그의 생전 모습을 생생히 묘사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8. 김완과 몽해 마을의 전설

  • 몽해 마을의 유래: 김완 장군의 출생지인 몽해 마을은 그의 어머니의 태몽에서 유래하였다. 한때 바닷물이 넘실거리던 지역은 현재 비옥한 들판으로 변했지만, 지역 주민들에게는 전설과 함께 깊은 의미를 지닌다.
  • 충절과 전설: 호랑이와 명당 전설, 그리고 지역 주민들의 자부심은 김완의 삶과 업적을 후대에 길이 전하는 역할을 한다.

9. 현재의 유적과 평가

  • 묘소와 신도비: 김완 장군의 묘는 전라남도 영암군 시종면 만수리에 위치하며, 신도비와 준마총이 함께 보존되고 있다.
  • 영당과 유허비: 충남 논산시 노성면의 학성군 영당은 김완 장군의 영정을 보존하고 있으며,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 문화적 가치: 김완 장군의 유적은 전라남도의 중요한 역사적 자산으로, 그의 충절과 무공은 후세에 귀감이 되고 있다. 지역 주민들과 후손들은 그의 유산을 지속적으로 보존하며, 이를 통해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하고 있다.

 

김완장군 신도비, 준마비 (전라남도 영암군 시종면 만수리 386-2)  

 

3.  김완장군 관련 기록 (유적관리 및 후원)

1. 1887년: 유허비 건립: 1887년, 후손들과 지역 주민들은 전라남도 구례군에 그의 충절과 무공을 기리기 위한 유허비를 건립하였다. 이는 김완 장군의 업적을 공식적으로 기념한 중요한 이정표로 평가된다 .

2. 1946년: 구고사 중건: 일제강점기와 전쟁으로 훼손된 구고사는 1946년 향내 유림과 후손들의 노력으로 복원되었고

3. 1979년~1983년: 묘역과 구고사 보수: 1979년부터 1983년까지는 묘소와 구고사의 복원 및 보수 공사가 이루어져 전라남도 기념물 제40호로 지정되며, 그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받았다.

4. 현대 관리와 보존: 현대에 들어와 김완 장군의 직계 후손과 지역 유림은 묘소, 신도비, 준마총, 구고사 등 유적지의 보존과 관리를 주도하고 있다. 전라남도와 논산시를 포함한 지방 정부와의 협력을 통해 유적지의 보존 상태를 유지하며 지속적인 관리에 힘쓰고 있다.

5. 현대 지역 기념사업: 구고사와 유허비를 중심으로 기념행사와 역사 교육 프로그램을 추진하여 지역 주민들에게 그의 충절과 무공을 알리고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현대적 기념 사업도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김완 장군 유적은 유허비 건립부터 현대의 지역 기념사업에 이르기까지 후손과 지역 주민들의 헌신을 통해 지속적으로 관리되고 있다. 이는 지역의 역사적 정체성을 유지하고 후대에 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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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름이 유사한 인물 金浣 - 경주 김씨

 

* 주의: 金浣 1546년(명종 1)~1607년(선조 40)과 혼돈하지 마시오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언수(彦粹), 호는 사성당(思誠堂).임진왜란 때 사도진 수군첨절제사(蛇渡鎭水軍僉節制使:종3품)로 충무공 이순신 휘하에서 전공을 세웠다.김완은 1546년 경상도 영천군(永川郡) 자양현 노항촌(현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노항리)[1]에서 성균관 생원 김응생(金應生)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김척(金滌)과 김한(金澣) 등 형 2명이 있었다. 일찍이 정로위(定虜衛)로 복무하다가 1577년(선조 10) 별시 무과에 병과 5위로 급제하였다.

난중일기에서 근무태만으로 제일 먼저 이순신에게 벌을 받은 무장으로 첫 등장한다.

그래도 임진왜란 때 이순신을 따라 출전하여 해전에서 적의 를 탈취하거나 목을 베어 오는 등 용맹을 떨치며 많은 공을 세웠으며, 또한 난중일기 곳곳에 이순신과 함께 술을 마시거나 활을 쏘는 등 함께 어울리는 모습이 자주 나타난다. 명량 해전에서 서술된 것을 살펴본다면 이순신 스스로도 자신이 설정한 기준이 엄격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으며, 이런 기준이 다른 게 아니라 현장 지휘 능력을 유지시키기 위함이라는 점에서 김완 역시도 이러한 처벌에 수긍했을 것이다.

그 후 조방장이 되었는데 원균의 칠천량 해전 때 참전했다가 패하고 물에 빠졌다가 일본군 병사들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었으며 일본에 끌려갔다. 나중에 탈출해서 조선으로 돌아왔고, 선조는 김완을 치하하면서 해동소무(海東蘇武)라는 어필을 하사했다고 한다. 김완의 후손들에 의해 간행된 그의 문집인 '해소실기'의 해소가 바로 이걸 뜻한다. 그 후 패전의 원인을 두고 원균을 비난하다가 선조에게 찍혀 파직당해 왜란이 끝난 후에야 함안 군수로 있다가 사망했다.

일본군에게 잡혀 끌려갔으나 탈출해 돌아온 뒤, 《용사일록(龍蛇日錄)》에서 이 상황을 회고하는데, 전문은 다음과 같다.
 
十六日五更, 賊雲集, 放砲夜驚. 我舟師已蒼黃擧碇, 疾者先出溫川, 鈍者未及出, 賊已回擁 (中略) 主將失措諸船已潰, 一半北于鎭海, 一半奔于巨濟. 時余獨掉後船鼓角促旗. 南渡浦萬戶姜應彪·會寧浦萬戶閔廷鵬·助羅浦萬戶鄭公淸·海南代將·江津大將等各從水使已走遠洋. 余獨與軍官·射夫及奴子, 放砲齊射, 殊夗力戰, 一倍厮殺之. 際勢甚孤弱, 揮旗馳進, 主將謝曰 "令公奮戰之力, 甚多也." (中略) 主將曰 "李億祺·崔浩不知去處. 惟令公戮力捕捉, 夗而後已." 聽訖回視, 賊船二隻已近百武之間. (中略) 余亦左脚中丸, 危怕之際. 高聲疾呼曰 "主將! 主將! 胡不出救!" 主將元均醉酒, 高臥號令, 軍官金大福片箭十餘射. (後略)

 

7월 16일 5경에 적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포를 쏘아 한밤을 놀라게 했다. 우리 수군은 이미 어찌할 수 없이 매우 급하게 되어 배를 멈추니 날랜 자들은 온천(溫川)으로 나아가고 둔한 자는 미처 나가지 못해 적에게 포위되었다. (중략) 주장(主將)은 명령체계를 잃어 모든 배가 무너지니 반은 진해에서 패했고, 반은 거제도로 달아나게 되었다. 이때 는 홀로 뒷배에서 호위하며 북을 치고, 나팔을 불고 깃발을 휘두르며 재촉하였다. 그러나 남도포(南渡浦) 만호 강응표(姜應彪), 회령포(會寧浦) 만호 민정붕(閔廷鵬), 조라포(助羅浦) 정공청(鄭公淸), 해남대장(海南代將), 강진대장(江津大將) 등은 이미 수사 원균을 따라 먼 바다로 도망가버렸다. 나는 혼자 군관(軍官), 사부(射夫), 노자(奴子)와 함께 일제히 대포를 쏘면서 사살하고 죽을 각오로 있는 힘을 다해 싸워 서로간에 많이 죽었으나 형세가 심히 허약하였다. 지치지 않고 깃발을 휘날리며 진격해 나아가 주장(主將)이 사례하며 말하기를 "영공(令公)이 분발하여 싸우는 힘이 심히 크다"고 했다. (중략) 주장이 말하기를 "이억기최호가 간 곳을 모르고 영공만이 죽을 힘을 다해 적을 사로잡고자 하니 죽은 뒤에야 그만 둘 것이냐"[7]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돌아보니 적선 2척이 이미 50보 이내로 가깝게 다가오고 있었다. (중략) 나 역시 왼쪽 다리에 탄환을 맞아 위태하고 두려운 시점이었다. 큰 소리로 급히 "주장! 주장! 어찌 나와서 구해주지 않는 것이오!"하고 불렀다. 주장 원균은 술에 취해 높이 누워 호령만 하고, 다만 군관 김대복(金大福)이 편전 10여발을 쏘았을 뿐이다. (후략) 김완, 『해소실기』 《용사일록》 

김경진과 안병도가 공저한 소설 임진왜란(김경진) 1권 ~ 2권의 칠천량 해전 관련 장면 대부분이 김완의 후손들이 1918년에 정리한 행장인 해소실기에 기반해서 작성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1908년에 발행된 김억추의 행장(현무공실기)과 마찬가지로 너무 긴 시간이 지난 뒤에 간행되었기 때문에 신뢰하기 어려워 보임에도 불구하고, 실록에 남은 기록과 사실상 일치하며 개인의 공훈이나 유능함을 과장하는 경향을 보이지 않고 그저 사실 그대로 담담하게 작성되어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전 세계 공통적으로 (조상에 대한 미화 등으로 인해) 과장이 심한 행장들 사이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경우. 말 그대로 가전 문서류를 그대로 취합한 사료집으로서의 성격이 강한 책이다. 이 때문에 해소실기를 유네스코 기록 문화 유산에 올려, 기존 등재된 조선 왕조 실록, 난중일기와 더불어 정유재란에 대한 객관적 시각을 가진 조상께 대한 예의를 표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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