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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돌아보기/한국역사 韓國歷史

어우동

by 경청 2024. 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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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박구마 (朴丘麻)
별칭: 어우동(於宇同), 어을우동(於乙宇同)
출생: 미상, 조선 충청도 음성군 음죽
사망: 1480년 10월 18일, 조선 한성부
직업: 시인, 서예가, 작가, 사상가, 화가, 무용가
학력: 한학 수학
종교: 유학 성리학
분야: 시문학, 서화
부모: 박윤창(朴允昌, 부), 정귀덕(鄭貴德, 모)
배우자: 태강수 이동(李仝, 이혼)
자녀: 번좌(番座, 딸)
친척: 박성근(朴成根, 오라비)

어우동의 생애

어우동(於宇同, 1440년경 ~ 1480년)은 조선 전기의 여성으로, 시인, 서예가, 작가, 기녀(妓女), 무희(舞姬)였다. 그녀는 조선 왕족이자 고위 관리의 부인에서 기녀로 전락한 뒤, 자유로운 연애를 통해 조선 사회의 도덕 규범에 도전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녀는 왕족의 아내였지만 이혼 후 기녀가 되었고, 조선 성종 시대에 조정의 고위 관료들과 연루된 성 스캔들 사건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면서 조선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여성 중 하나가 되었다.

본래 그녀는 충청도 음성군 음죽현 출신으로, 승문원 지사(承文院知事) 박윤창(朴允昌)의 딸로 태어났다. 본명은 박구마(朴丘麻)였으나, 후에 '어우동(於宇同)' 또는 '어을우동(於乙宇同)'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녀의 출생 연도는 정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대략 1440년경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의 가족은 유학적 교양을 갖춘 집안이었으며, 어우동은 한학을 공부하고 예술에 능한 여성이었다.

출생과 가문

어우동의 아버지 박윤창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세종 대에 동진사(東進士) 시험에 합격하여 승문원 지사를 지낸 인물이다. 그녀는 양반가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교육을 받으며 학문과 예술을 익혔다. 그녀는 시문과 서화, 춤과 가야금 등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이러한 예술적 재능은 후에 많은 문인과 예술가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이유가 되었다.

어우동은 왕족 태강수 이동(泰康守 李仝)과 결혼하면서 조선 왕실의 일원이 되었다. 태강수 이동은 태종의 서손자(庶孫)로, 세종의 둘째 형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의 후손이었다. 어우동은 태강수와의 결혼으로 외명부의 품계인 '혜인(惠人)'에 봉해졌으나, 부부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그녀는 이동과의 사이에서 딸 번좌(番座)를 낳았지만, 아들을 두지 못했다는 이유로 남편의 냉대를 받았고, 결국 이혼하게 되었다.

이혼의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남편 이동이 기생이나 첩과의 관계로 인해 어우동을 내쫓았다고 전해진다. 또한 그녀가 은장이(銀匠)와의 간통 혐의로 인해 쫓겨났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성종의 판결에 따르면 그녀의 간통 사건은 무죄로 판명되었고, 남편 이동의 잘못이 더 컸다고 한다. 그러나 이동은 법원의 재결합 명령을 거부했고, 어우동은 왕실 족보에서 삭제되며 사회적으로 고립되었다.

이혼 후의 삶과 예술 활동

이혼 후 어우동은 딸과 함께 친정으로 돌아갔으나, 아버지 박윤창은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홀로 남겨진 어우동은 길가에 작은 집을 마련해 살면서 더욱 자유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다. 그녀는 다양한 남성들과 관계를 맺으며 조선 사회의 규범을 거부한 대표적인 여성으로 떠올랐다. 시문과 서화에 능했던 그녀는 많은 문사들과 교류하며 예술적 활동을 이어갔다.

어우동은 문필 활동을 통해 자신의 심정을 표현했으며, 많은 이들과 교류했다. 기생으로서 예술적 재능을 활용한 그녀는 당대 명사들과 어울리며 시문을 주고받았고, 그녀의 집은 많은 지식인들이 드나드는 장소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로운 삶은 조선 사회의 엄격한 성리학적 도덕 규범과 충돌하게 되었다.

특히 그녀의 자유로운 연애 편력은 조선 사회의 눈에 큰 문제로 비춰졌으며, 많은 이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어우동은 기생이 된 후에도 뛰어난 미모와 예술적 재능으로 많은 남성들의 관심을 받았다. 왕족부터 양반, 중인, 서리(書吏)까지 다양한 계층의 남성들과 관계를 맺었으며, 그 중 일부는 스스로 그녀의 이름을 몸에 새기기도 했다.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일이었다.

스캔들 사건과 처형

1480년, 어우동과 관련된 성 스캔들이 발각되면서 사건은 조정으로 번졌다. 당시 김종직과 사림파를 비롯한 여러 관료들은 어우동의 성문란 행태를 문제삼아 그녀를 탄핵했다. 어우동은 의금부에 체포되어 문초를 받았으며, 풍기문란 혐의로 기소되었다. 당시 관련된 남성들은 대부분 혐의를 부인했으나, 어우동은 자신이 관계를 맺은 모든 남성의 이름을 자백했다.

이 사건은 조선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당시의 도덕적 기준을 시험하는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어우동은 사형을 주장하는 사림파의 압력 속에서 군기감 앞에서 처형되었다. 그녀는 삼종지도(三從之道)를 문란하게 했다는 죄명으로 처형되었지만, 함께 연루된 남성들은 대부분 사면되거나 경미한 처벌만 받았다. 이는 그녀의 처형이 당시 조선 사회에서 여성을 억압하는 성리학적 도덕 규범의 결과였다는 비판을 낳았다.

사후 평가와 유산

어우동은 조선 역사상 가장 논란이 많은 여성 중 하나로 남았다. 그녀의 시문과 작품들은 대부분 사라졌으며, 그녀의 예술적 재능은 '음부의 작품'이라는 이유로 폄하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유감동, 황진이, 대방군부인 송씨 등과 함께 부도를 어긴 여성의 대명사로 지탄받았으며, 그녀의 이름은 음탕한 여성을 가리키는 대명사로 구전되었다.

그러나 1910년 대한제국 멸망 이후 어우동에 대한 동정적 평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남성 중심의 유교적 사회 규범을 거부한 여성으로 재조명되었고, 이후 문학, 연극, 영화 등의 예술 작품에서 자유와 사랑을 위해 싸운 비극적 여성으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이야기는 여러 작품 속에서 재해석되었으며, 1985년에는 이장호 감독의 영화 《어우동》이 개봉되어 큰 주목을 받았다. 이외에도 소설, 연극, 드라마 등에서 그녀의 삶이 다뤄졌다.

시와 문학적 평가

어우동은 시문과 서화에 뛰어난 재능을 지닌 예술가였다. 그녀는 감정을 시로 표현하는 데 능했으며, 부여회고(扶餘懷古)라는 시를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이 시는 어우동의 예술적 재능을 인정받은 작품으로, 조선 후기 문인 권응인이 자신의 저서 《송계만록 (松溪漫錄)》에서 그녀의 시를 소개하면서도 음부라는 이유로 비난을 피하지 못했다.

 

부여회고 (扶餘懷古)
白馬臺空經幾歲 / 백마대 텅 빈 지 몇 해가 지났는고
落花巖立過多時 / 낙화암은 서서 많은 세월을 보냈네
靑山若不曾緘黙 / 청산이 침묵하지 않았다면
千古興亡問可知 / 천고의 흥망을 물어 알 수 있으련만

어우동은 자신만의 시적 세계를 통해 여성으로서의 감정과 삶을 표현했으며, 조선 사회의 성리학적 억압에 저항하는 상징적인 인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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