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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주변 돌아보기/사건사고 事件事故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

by 경청 2024.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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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MS 타이타닉의 침몰은 1912년 4월 14일 북대서양에서 발생한 역사적인 참사로, 인류 역사상 가장 잘 알려진 해양 사고 중 하나입니다. 이 사건은 현대 해운 기술의 한계를 폭로했고, 안전과 관련된 여러 조약과 규정의 변화를 촉발했습니다. 다음은 타이타닉호의 출항과 침몰 당일의 세부적인 상황을 자세히 설명한 내용입니다.

배경 (4월 10일 ~ 14일)

RMS 타이타닉은 1912년 4월 10일, 영국의 사우샘프턴 44번 부두에서 화려한 출항을 알렸습니다. 이 거대한 여객선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크고 호화로운 선박 중 하나로 평가받았으며, 대서양 횡단 노선을 따라 프랑스 셰르부르와 아일랜드 퀸즈타운에 기항한 후, 4월 17일 아침 미국 뉴욕에 도착할 예정이었습니다. 타이타닉의 첫 번째 항해는 많은 이민자와 부유층 승객들이 탑승해 신대륙을 향한 기대감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여정은 비극으로 끝나게 됩니다. 북대서양 항로를 따라 항해하던 타이타닉은 4월 14일 밤, 위험 경고를 무시하고 전속 항해를 계속하던 중 빙산과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사고 당일 (4월 14일)

타이타닉호의 출항 당시, 견시용 쌍안경 보관함의 열쇠가 제대로 인계되지 않는 실수가 발생했습니다. 이로 인해 견시들은 쌍안경을 사용할 수 없었고, 육안으로만 위험을 감지해야 했습니다. 사고 초기에는 쌍안경을 사용하지 못한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는 의견이 있었으나, 나중에 이루어진 실험에서는 쌍안경을 사용하더라도 빙산을 발견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실험에서 빙산은 검은 원으로만 보였다고 합니다. 그날 밤, 차가운 북대서양의 공기와 무월(無月)의 칠흑같은 밤, 잔잔한 바다까지 겹친 악조건 속에서 빙산을 발견하기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타이타닉은 항로에 있던 빙산 경고를 여러 차례 무선으로 받았으나, 선박의 무선 통신을 담당했던 두 명의 통신사는 승객들의 개인 통신에 바빴고,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적어도 6차례의 경고가 효과적으로 전달되지 못하고, 위험이 가중되었습니다.

빙산과의 충돌

운명의 1912년 4월 14일 밤 11시 39분, 타이타닉의 견시 프레드릭 플리트가 전방 450미터 앞에 있는 빙산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늦은 상태였습니다. 빙산의 대부분은 수면 아래에 잠겨 있었고, 견시가 육안으로 이를 발견했을 때에는 회피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프레드릭 플리트는 즉시 경고 벨을 울리고 선교로 보고했습니다. 제임스 무디 항해사는 보고를 받자마자 1등 항해사 윌리엄 머독에게 전달했고, 머독은 좌현으로 급격히 방향을 틀며 엔진을 후진시키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타이타닉은 너무 크고 회전 반경이 커서, 충분한 감속과 방향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11시 40분, 타이타닉의 우현이 빙산과 충돌하여 선체의 측면이 손상되었습니다. 영화 타이타닉에서 이 충돌 장면은 약 2분 동안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배가 23노트의 속도로 항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충돌까지의 시간은 불과 38초에 불과했습니다. 영화적 연출을 위해 상황이 실제보다 훨씬 길게 그려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충돌 당시 가설 및 반론

충돌 직후에 대한 여러 가지 가설이 제기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빙산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충돌했더라면 더 큰 손상을 입지 않고 침몰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정면 충돌 시 피해가 선수에만 국한되어 배가 침몰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제기되었으나, 이는 결과론적인 해석에 불과합니다. 그 당시에 정면 충돌을 시도하는 것은 매우 위험했고, 선박의 전체에 엄청난 충격이 가해져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한, 당시 사용된 강철판과 리벳의 재질 문제가 지적되었습니다. 타이타닉호의 선체에 사용된 강철은 그 당시 최고의 품질이었지만, 차가운 바다 환경에서 강철의 성질이 약해졌고, 빙산과의 충돌로 인해 손상되기 쉬운 상태였습니다. 더구나 리벳에 섞인 불순물로 인해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파손이 발생한 것이 침수의 주요 원인으로 분석되었습니다.

침몰 당일 (4월 15일)

타이타닉이 빙산과 충돌한 후, 손상이 심각한 것이 밝혀지자 스미스 선장은 즉시 승객들의 대피를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초기에는 승객들과 승무원들이 상황을 심각하게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일부 승객들은 빙산에서 떨어져 나온 얼음조각으로 장난을 치기도 했고, 1등실 승객들은 위스키에 넣을 얼음으로 사용하기 위해 얼음을 가져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선박의 설계자인 토머스 앤드루스가 선체 손상을 분석한 결과, 배는 최대 2시간밖에 버틸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침수 속도는 빨라졌고, 방수격벽이 있는 구역까지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습니다.

타이타닉의 최후 순간

배는 결국 새벽 2시 20분에 완전히 침몰하였습니다. 타이타닉의 마지막 순간, 선박은 두 동강이 나면서 선수는 해저로 빠르게 가라앉았고, 선미는 잠시 수면 위에 떠있다 끝내 바다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배가 가라앉은 후 차가운 바다 위에는 약 천 명에 가까운 생존자가 떠 있었지만, 그 중 상당수가 영하 2도의 차가운 바다에서 저체온증으로 사망했습니다. 구명정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바다 위에서 들리는 비명 소리를 듣고도 구조를 시도하지 못했습니다.

구조와 생존자들

타이타닉의 무선 신호를 받은 RMS 카르파티아호는 즉시 구조 작업을 위해 달려왔지만, 구조가 이루어지기까지 4시간이 걸렸습니다. 그 시간 동안 수백 명이 저체온증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카르파티아호는 700명이 넘는 생존자를 구출했고, 그들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많은 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타이타닉호의 침몰은 그 규모와 참혹함 때문에 현대 역사에서 여전히 중요한 사건으로 남아 있으며, 이 사건은 해상 안전 규정을 강화하고, 국제 해사 기구의 설립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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