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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 돌아보기/인물탐방 人物探訪

양귀비, 楊貴妃

by 경청 2024. 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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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귀비

 

 

**양귀비(楊貴妃)**는 8세기 초중엽 당나라(唐) 현종(玄宗)의 며느리였다가 후궁이 된 인물이다. 그녀의 본명은 정확히 전해지지 않으나, 도사로 활동하던 시절에 사용한 도호(道號)인 ‘태진(太眞)’을 사용하여 역대 사서에서 양태진(楊太眞)이라고 기록되었다. 본래 아명은 옥환(玉環) 또는 옥노(玉奴)라고 전해지며, 대중들 사이에서는 양옥환(楊玉環)으로 알려져 있다.

 

가문과 어린 시절

 

양귀비의 본관은 포주(蒲州) 영락(永樂)이며, 개원(開元) 7년(719)에 용주(容州)에서 태어났다. 양귀비가 태어날 때 손에 옥으로 된 고리(玉環)를 쥐고 있었다는 속설이 있으며, 이로 인해 부모가 그녀의 아명을 옥환(玉環)으로 지었다고 전해진다. 어린 시절에 부모를 여의고 숙부의 집에서 자랐다.

 

개원 23년(735), 양귀비는 현종의 제18황자인 수왕(壽王) 이모(李瑁)와 결혼하여 왕비(妃)가 되었다. 그러나 개원 25년(737), 황제 현종이 사랑했던 후궁 무혜비(武惠妃)가 죽자, 우울해진 현종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고력사(高力士) 등 신하들은 양귀비를 황제에게 소개하였다. 현종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해 그녀를 후궁으로 삼으려 했으나, 당시 양귀비는 아들의 아내였기에 직접 후궁으로 맞아들이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서 양귀비를 도관(道觀)에 출가시켜 도사로 만들고, '태진(太眞)'이라는 도호를 주었다.

 

황제의 총애와 권력

 

천보(天寶) 4재(745년)에 이르러, 양태진은 귀비(貴妃)로 책봉되었다. 비록 황후는 아니었지만 사실상 황후와 같은 대우를 받았다. 양귀비는 아름다운 외모뿐만 아니라 가무(歌舞)에 능했고, 현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그녀의 총명함과 재치로 인해 현종은 그녀를 ‘해어화(解語花)’라고 부르며 칭찬하였고, 시인 이백(李白)은 그녀를 모란에 비유하기도 했다. 백거이(白居易)는 후일 그녀와 현종의 이야기를 장한가(長恨歌)에 담았다.

 

현종은 양귀비에게 큰 애정을 보이며, 그녀의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녀를 위해 화청궁(華清宮)으로 거처를 옮기고, 남방(南方)에서 특산된 과일 여지(荔枝)를 신속히 공수하도록 했다. 이러한 극진한 대우로 인해 양귀비와 그녀의 가문은 막강한 권력을 누리게 되었다.

 

양씨 가문의 권력과 몰락

 

현종은 양귀비의 가문에도 큰 혜택을 베풀었다. 양귀비의 세 언니들은 각각 한국(韓國), 괵국(虢國), 진국부인(秦國夫人)으로 봉해졌으며, 친척 오빠 양국충(楊國忠)은 재상이 되었다. 그러나 양씨 가문의 권력 남용과 국정 농단은 많은 비판을 받았다. 특히, 양국충과 절도사 안녹산(安祿山) 사이의 권력 다툼은 당나라의 불안정한 정치 상황을 악화시켰다.

 

천보 14재(755), 안녹산은 반란을 일으켰고, 이듬해 천보 15재(756)에는 반란군이 장안(長安)까지 진격하였다. 현종과 양귀비는 도주하였으나, 마외역(馬嵬驛)에서 호위병들이 양씨 가문에 대한 불만을 터뜨리며 양귀비의 처형을 요구했다. 결국, 양귀비는 현종의 눈앞에서 자결했다.

 

대중문화와 전설

 

양귀비는 중국의 4대 미인으로 꼽히며, 역사상 최고의 미인으로 회자된다. 그녀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는 시와 문학, 연극, 영화 등 다양한 매체에서 다루어졌다. 특히 백거이의 장한가는 그녀와 현종의 슬픈 사랑을 소재로 한 대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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