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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 돌아보기/인물탐방 人物探訪

클레오파트라 7세

by 경청 2024. 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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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의 두상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亞律來忒斯)의 딸인 클레오파트라 7세(克里奧帕特拉 七世)는 고대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王朝)의 실질적 마지막 군주이자, 사실상 최후의 파라오(法老)로 여겨진다. 엄밀히 말하면, 그녀의 아들 카이사리온(凱撒利翁)이 족보상 마지막 파라오이나, 그가 어머니와 공동 통치를 했고 독립적인 재위 기간이 없었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은 클레오파트라를 최후의 파라오로 간주한다.

 

이러한 현상은 근대 이집트의 마지막 왕조인 메흐메드 알리 왕조(王國)에서도 반복되었다. 공식적으로 최후의 군주는 푸아드 2세(二世)이지만, 즉위 당시 너무 어렸고, 재위 기간도 짧았기 때문에 사실상 그의 아버지 파루크 1세(一世)가 마지막 왕으로 기억된다. 이 점에서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리온의 관계와 유사하다. 흥미롭게도, 고대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그리스계, 메흐메드 알리 왕조는 알바니아계로, 두 왕조 모두 유럽계 혈통을 가졌다.

 

클레오파트라는 공식적으로 파라오로 즉위한 마지막 인물이었다. 이후 이집트는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으며 독립된 군주로서의 파라오의 명맥은 끊겼다. 로마 황제(皇帝)들이 이집트에서는 상징적으로 파라오의 칭호를 사용하였으나, 실질적인 의미는 없었으며, 기독교가 확산되면서 이러한 의식도 중단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가는 남자 통치자들이 모두 '프톨레마이오스'라는 이름을 사용하였고, 여자 통치자들은 클레오파트라(克里奧帕特拉), 베레니케(貝雷尼克), 아르시노에(阿爾西諾伊)의 이름을 썼다. 그중 클레오파트라는 '테아 네오테라'(Thea Neotera)라는 별칭으로 불렸으며, 이는 '새로운 여신'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한편, 클레오파트라 이후 순혈 이집트인 지도자는 1952년 혁명 이후 권력을 잡은 가말 압델 나세르(嘉馬 阿布德納賽르) 전 대통령으로 알려져 있다. 그 이전까지 이집트의 모든 지도자는 외국 혈통을 가진 이들이었기 때문에, 나세르는 클레오파트라 이후 최초의 순혈 이집트인 지도자로 기록된다.

 

클레오파트라의 외모에 대한 묘사는 당대와 현대의 이미지가 상당히 다르다. 그녀는 마케도니아 출신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후손으로, 그리스계 혈통을 이어받았다. 당시의 동전과 조각상을 보면 그녀는 그리스적 특징을 지닌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곱슬머리, 매부리코, 움푹 들어간 눈두덩이는 전형적인 그리스 외모를 나타낸다. 그러나 그리스와 이집트 방식으로 묘사된 유물에서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어느 쪽을 그대로 신뢰하기는 어렵다.

 

많은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클레오파트라는 빼어난 미모와 매혹적인 목소리, 지성으로 사람들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녀가 미인으로 묘사된 것은 후대의 작품에서 비롯된 것이며, 당시 유물에 묘사된 외모는 현대의 미인과는 거리가 있다고도 한다. 당시의 미 기준과 현대의 미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다.

 

클레오파트라는 능력 있는 정치가였으며, 여러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다. 그녀는 당시 이집트 파라오들이 거부했던 이집트어를 배운 최초이자 마지막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통치자였다. 그녀는 로마의 최고 권력자들과 정치적으로 교류하며 자신의 권력을 유지했고, 이집트 내에서는 이시스 여신의 현신으로 존경받았다.

 

그러나 그녀의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외세의 힘을 빌려 나라를 구하려는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안토니우스(安東尼烏斯)와 함께 한 악티움 해전에서 패배한 후, 이집트는 로마 제국의 속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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