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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돌아보기/한국인물 韓國人物

이휘소 박사

by 경청 2024. 1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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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저민 휘소 리(영어: Benjamin Whisoh Lee, 1935년 1월 1일~1977년 6월 16일), 한국명 이휘소(李輝昭)는 한국계 미국인 이론물리학자로, 입자물리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자발적 대칭성 깨짐을 설명하는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 문제를 해결하고, 맵시 쿼크(Charm Quark)의 질량을 예측함으로써 이 분야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그는 20여 년간 물리학자로서 활동하며 110편의 논문을 발표했으며, 이 중 77편이 학술지에 실렸고, 수많은 논문이 학계에서 활발히 인용되었습니다.

유년기와 교육

이휘소는 1935년 1월 1일, 일제 강점기 조선 경성부 원정(현 서울특별시 용산구 원효로)에서 아버지 이봉춘과 어머니 박순희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부모 모두 의사였으나, 아버지는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받고 치료하는 것을 꺼려하여 직업적으로 크게 활동하지 않았고, 가정의 주된 생계는 어머니가 담당했습니다. 어머니는 의사로서 자혜병원에서 근무하다가 후에 소아과와 산부인과를 전문으로 한 자애의원을 개업하여 활동했습니다. 이휘소는 어릴 적부터 남다른 지적 호기심을 보였습니다. 1941년, 경성사범학교 부속제1국민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이 학교는 일본인 중심의 학교였으며 조선인 학생은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학업에서 두각을 나타내었고, 특히 과학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이휘소의 가족은 그 무렵 신설정(현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 및 성북구 보문동)으로 이사하면서 그가 독서를 통해 더욱 많은 지식을 쌓을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특히 그는 친구의 집에서 일본의 월간 과학 잡지인 《어린이 과학》(子供の科学)을 즐겨 읽었고, 과학에 대한 꿈을 키웠습니다.

중학교와 전쟁 속의 청소년기

1947년, 경기중학교에 입학한 이휘소는 학업에서 언제나 상위권에 속했으며, 특히 화학반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자연과학에 대한 열정을 키웠습니다. 그러나 그의 청소년기는 1950년에 발발한 한국 전쟁으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전쟁이 발발한 후, 가족은 서울에서 충청남도 공주로 피난을 갔고, 그곳에서 어머니는 다시 병원을 개업해 활동했으며, 이휘소는 그런 어머니를 도와 병원 운영에 필요한 약품을 이웃 도시 대전에서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이휘소는 전쟁 속에서도 학업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경기중학교가 부산으로 이전하자, 이휘소는 검정고시를 통해 대학 입학 자격을 취득하고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화학공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했습니다. 당시 서울대학교는 전쟁의 영향으로 부산광역시 대신동에 임시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미국 유학과 물리학 전공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서 한 학기 동안 화학공학을 전공하던 이휘소는 물리학에 더욱 큰 흥미를 느꼈습니다. 당시 한국에서는 응용학문인 화학공학이 중시되었으나, 이휘소는 물리학의 이론적 기초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물리학으로 전과하려는 여러 차례 시도가 좌절되자, 그는 주한미군 장교 부인회에서 지원하는 유학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1955년 미국 마이애미 대학교로 편입하게 됩니다. 마이애미 대학교에서 물리학을 전공하며 이휘소는 뛰어난 학업 성과를 보였고, 1956년 최우등(summa cum laude)으로 졸업했습니다. 졸업 후, 그는 피츠버그 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입자이론물리학, 특히 양자장론을 전공했습니다. 그는 1960년 "K+ 중간자와 핵자 산란 현상"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는 25세에 불과했습니다.

학문적 연구와 주요 업적

박사 학위 취득 후, 이휘소는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등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하며 이론물리학의 중요한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특히 자발적 대칭성 깨짐(Spontaneous Symmetry Breaking)을 설명하는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 문제를 해결하면서 그는 물리학계에 큰 족적을 남기게 됩니다. 이 연구는 양-밀스 이론이 난해한 수학적 문제로 인해 그 가능성이 막혀 있었던 시점에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양-밀스 이론이 물리학의 기본 틀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 이휘소는 맵시 쿼크의 질량을 예측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 이론물리학자들은 쿼크가 자연계의 기본 입자 중 하나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정확한 쿼크의 종류와 질량은 밝혀지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이휘소는 케이온(K meson)의 섞임과 붕괴 현상에 대한 계산을 통해 맵시 쿼크의 질량 범위를 예측했으며, 이 연구는 1974년 실제로 맵시 쿼크가 발견되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교육 활동과 연구 확장

이휘소는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에 걸쳐 뉴욕 주립 대학교 스토니브룩에서 정교수로 재직하며 학문적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이 시기 그는 게이지 이론에 관한 강의를 진행하면서 대학원생들과 함께 "게이지 이론"에 대한 연구 논문을 저술하였습니다. 이 논문은 이후 게이지 이론의 기초적 이해와 확장을 위한 중요한 참고자료가 되었습니다. 이 시기 동안 이휘소는 물리학계를 선도하는 연구자들과 활발히 교류하며 입자물리학의 발전을 이끌었습니다. 1973년에는 페르미 국립 가속기 연구소에서 이론물리학 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이곳에서 양전닝과 같은 저명한 학자들과 함께 입자물리학 연구를 주도했습니다. 이휘소는 미국 내 여러 학술기관에서 강연을 하며 입자물리학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와 이론을 전파하였고, 특히 미국의 물리학계에서 그의 영향력은 매우 컸습니다.

불의의 사고와 유산

이휘소는 1977년 6월 16일, 가족들과 함께 콜로라도 주의 여름 연구 심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이동하던 중, 일리노이 주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습니다. 당시 그가 타고 있던 차는 대형 트럭의 타이어가 터지며 도로를 벗어나 충돌하였고, 이 사고로 인해 이휘소는 즉사했습니다. 사고로 인해 그의 죽음은 갑작스럽게 다가왔고, 물리학계에 큰 충격을 안겼습니다. 이휘소는 물리학계에서 그의 중요한 기여와 업적으로 여전히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의 연구는 특히 헤라르뒤스 엇호프트와 같은 후배 물리학자들에게 결정적인 영감을 주었으며, 1999년 엇호프트는 이휘소의 연구를 바탕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되었습니다. 이휘소가 살아 있었다면 노벨상을 공동 수상했을 것이라는 평가가 많습니다.

평가와 유산

이휘소는 현대 물리학의 발전을 10년 이상 앞당겼다는 평가를 받으며, 그의 연구는 현재까지도 학문적 가치가 큽니다. 스티븐 와인버그, 압두스 살람, 셸던 리 글래쇼와 같은 노벨상 수상자들도 이휘소의 연구에 대한 공헌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특히, 와인버그는 "리-와인버그 경계"라는 개념을 통해 암흑물질의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이 연구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와인버그와 함께 연구하던 분야였습니다. 그의 연구는 입자물리학의 이론적 기초를 확립하고, 현대 물리학의 중요한 도구가 된 게이지 이론의 완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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