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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돌아보기/한국역사 韓國歷史

황산벌 전투

by 경청 2024. 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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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0년 음력 7월 9일부터 10일에 걸쳐 현재의 충청남도 논산시 황산벌(黃山伐)에서 벌어진 백제(百濟)와 신라(新羅) 간의 대규모 전투는 삼국시대의 운명을 결정지은 중요한 전투였다. 이 전투는 백제의 멸망을 가속화하고 신라가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전투 배경

백제는 당시 강대국이었던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 즉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의 협공에 직면해 있었다. 신라는 당나라와 동맹을 맺고 백제와 고구려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신라의 목표는 백제의 수도 사비성(泗沘城, 현재의 부여)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이에 당나라 군대는 12만 명, 신라군은 5만 명을 동원했다. 신라군을 이끈 장수는 당대 최고의 명장 김유신(金庾信)으로, 그는 신라군을 이끌고 백제의 영토로 진격하였다.

 

660년 5월, 신라군은 서라벌(徐羅伐)을 출발해 백제를 향해 진군했으며, 당나라의 대군은 6월 덕물도(德勿島)에 상륙했다. 나당연합군은 각각 동쪽과 서쪽에서 백제를 협공하기로 하고, 7월 10일 사비성에서 만나기로 했다. 신라는 이 합류를 위해 최대한 빨리 백제의 저항을 뚫고 사비성에 도착해야 했다.

백제의 대응과 전략

백제는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맞서기 위해 두 가지 전략을 논의했다. 첫 번째 전략은 성충(成忠)과 흥수(興首)가 제안한 방어적 전략으로, 기벌포(伎伐浦)와 탄현(炭峴)에서 신라와 당군을 동시에 저지하여 방어선을 구축하자는 것이었다. 두 번째 전략은 의직(義直)이 제안한 공격적 전략으로, 적군의 진입을 허용한 후 좁은 길목에서 공세를 가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백제 조정은 최종적으로 신라군의 진격을 최대한 저지하고, 수도를 방어하는 전략을 선택하게 되었다.

 

백제의 명장 계백(階伯)은 백제의 최후를 막기 위해 5천 명의 결사대를 조직했다. 그가 지휘하는 결사대는 신라군의 진격로인 황산벌에서 최후의 항전을 벌이기로 했다. 계백은 전투에 앞서 처자식을 모두 죽이며, 죽음을 각오하고 전장에 나섰다. 이는 백제 멸망의 위기에서 그가 얼마나 결사적인 전투를 다짐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병사들에게 "구천(句踐)은 5천 명으로 오나라(吳國)의 70만 대군을 물리쳤다. 우리도 힘을 다해 싸워 나라에 보답하자"고 외치며 사기를 고양시켰다.

황산벌 전투

7월 9일, 김유신이 이끄는 5만 신라군은 황산벌에 도착했다. 황산벌은 사비성으로 가는 마지막 요충지였기 때문에, 이곳에서 백제와 신라의 운명을 건 전투가 벌어졌다. 계백은 5천 명의 소규모 병력으로 10배가 넘는 신라군을 막아내야 했다. 그는 백제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 방어에 유리한 위치를 선점했고, 신라군과의 전투를 벌였다.

 

첫날 전투는 치열했다. 신라군은 네 차례에 걸쳐 백제군을 공격했으나, 계백의 지휘 아래 백제군은 이를 모두 막아냈다. 백제군은 열세였지만, 사비성 방어라는 막중한 책임을 짊어지고 있었기에 필사적으로 싸웠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백제군이 신라군의 공격을 "고슴도치처럼 맞서 싸웠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백제군은 사력을 다해 저항했다.

 

그러나 전세는 서서히 신라군에게 유리하게 기울어갔다. 김유신은 신라의 용맹한 화랑(花郞)들을 앞세워 백제군을 압박했다. 특히 화랑 반굴(盤屈)과 관창(官昌)이 신라군을 이끌고 백제군을 돌파하려 했는데, 관창은 전투 중 포로로 잡혔으나 다시 풀려나고, 두 번째 돌격을 감행하다가 전사했다. 계백은 관창의 목을 베어 신라군에 돌려보내며 최후의 저항을 시도했지만, 신라군의 압도적인 공세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백제군은 신라군의 다섯 번째 공격을 막지 못하고 전멸했다. 계백과 그의 결사대 5천 명은 모두 황산벌에서 전사했다. 이로써 백제군은 사비성으로 향하는 신라군을 저지하지 못하게 되었다.

전투의 결과와 백제의 멸망

황산벌 전투는 백제의 운명을 바꾼 결정적 전투였다. 백제군의 필사적인 저항에도 불구하고 신라군은 승리했고, 백제의 수도 사비성으로 진격할 수 있었다. 신라군은 당군과 사비성에서 합류하여 나당연합군을 결성, 백제의 수도를 포위하고 공격했다. 결국 백제는 660년 7월,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의해 멸망했다. 의자왕(義慈王)은 항복했고, 백제의 왕실과 귀족들은 당나라에 압송되었다.

 

이 전투는 삼국시대의 판도를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백제의 멸망은 고구려의 고립을 초래했고, 신라는 이후 고구려마저 멸망시키며 한반도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황산벌 전투는 백제의 최후의 저항을 상징하며, 계백의 용맹과 충성심은 후대에까지 전해졌다.

전투의 상징성과 의의

황산벌 전투는 단순한 군사적 충돌을 넘어, 백제의 운명을 결정지은 상징적인 전투로 평가된다. 계백과 5천 결사대는 적의 압도적인 병력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싸우며 조국을 지키기 위해 희생했다. 이는 백제 멸망의 비극적 마지막 장면을 그리며, 그들의 용맹과 충절은 후대에 전설처럼 전해지게 되었다.

 

또한, 황산벌 전투는 삼국 통일을 위한 신라의 결정적 승리로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이 전투를 통해 신라는 백제의 군사력을 무너뜨렸고, 이후 당나라와의 연합을 통해 고구려까지 정복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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