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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돌아보기/한국역사 韓國歷史

나당전쟁 羅唐戰爭

by 경청 2024. 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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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당전쟁(羅唐戰爭, 670-676년) 

 

나당전쟁은 서기 670년 신라(新羅)와 고구려(高句麗) 부흥군이 당(唐)나라가 장악한 요동(遼東)을 선제 공격하면서 시작된 전쟁으로, 676년 기벌포(伎伐浦) 전투에서 신라가 승리하면서 종결되었다. 이 전쟁은 한반도에서 당나라가 차지한 백제(百濟)와 고구려의 영토를 두고 신라와 당 사이의 충돌이 본격화된 결과였다. 전쟁이 끝난 후 신라는 한반도 남부에서 완전한 주도권을 차지하였고, 당나라는 한반도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1. 전쟁의 배경과 원인

 

1.1 신라와 당의 동맹

7세기 후반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협력으로 어려움을 겪던 시기였다. 643년, 고구려가 김춘추(金春秋)의 동맹 요청을 거절하고 백제와 손을 잡자 신라는 다른 동맹국을 찾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결국 신라는 당나라와 동맹을 맺고, 백제와 고구려에 대항하기로 했다. 김춘추는 당나라로 가서 도움을 요청했으며, 진덕여왕(眞德女王)은 당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이는 등 적극적인 외교 관계를 추진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신라는 660년 나당연합군을 통해 백제를 멸망시켰고, 668년에는 고구려까지 멸망시키며 대승을 거두었다.

 

1.2 당나라의 한반도 진출 야욕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후 당나라는 한반도 전역을 장악하려는 야심을 드러냈다. 당은 고구려의 옛 땅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백제의 옛 땅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설치하며 직간접적인 통치에 나섰다. 특히 당나라는 신라를 계림대도독부(鷄林大都督府)로 격하시켜 신라의 자주권을 침해하려 했고, 신라의 왕 문무왕(文武王)을 계림주대도독으로 임명하여 당의 속국처럼 대우했다.

이러한 정책은 신라에게 심각한 정치적, 외교적 위협으로 다가왔다.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공로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이익을 얻지 못했고, 오히려 당나라의 통치 야욕으로 인해 주권이 위협받게 되었다. 특히, 당나라는 이미 멸망한 백제의 왕자 부여융(扶餘隆)을 웅진도독으로 임명하여 신라와 백제를 동등한 지위로 보이게 했고, 신라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다.

 

1.3 나당전쟁의 발발

당나라의 이러한 지배 강화 시도는 신라의 불만을 고조시켰고, 결국 신라는 전쟁을 선택하게 되었다. 670년, 신라는 고구려 부흥세력과 연합하여 요동의 오골성(烏骨城)을 선제 공격하면서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시점부터 신라는 당나라와 본격적인 군사 충돌을 벌이며 한반도에서 당나라의 세력을 몰아내려는 목표를 세웠다.

 

2. 전쟁의 전개

 

2.1 요동 선제 공격과 나당전쟁의 시작

670년 신라는 고구려 유민 세력과 손을 잡고 요동 지역에 대한 선제공격을 감행했다. 신라의 설오유(薛烏儒)와 고구려의 고연무(高延武)가 이끄는 2만 명의 연합군은 압록강을 넘어 요동의 오골성을 공격해 승리를 거두었다. 이 공격은 신라가 당나라를 상대로 전쟁에서 주도권을 확보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요동 공격 이후, 신라는 당나라가 지배하던 백제의 옛 영토를 다시 공격하기 시작했다. 671년 신라는 당나라가 설치한 웅진도독부를 겨냥해 성 63개를 함락시키고, 백제 지역을 점령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신라는 당나라의 군대와 지속적으로 충돌했으며, 백제 지역에서 여러 차례 전투가 벌어졌다.

 

2.2 주요 전투와 충돌

나당전쟁의 주요 전투 중 하나는 671년에 벌어진 석성 전투(石城戰鬪)였다. 신라군은 당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었고, 당군 5,300명의 목을 베며 전과를 올렸다. 신라는 당군의 보급을 방해하고, 백제 지역에서의 당나라 세력을 약화시키는 전략을 지속적으로 구사했다. 당나라는 이에 맞서 설인귀(薛仁貴)를 계림도행군총관으로 파견하여 신라를 공격하게 했고, 신라와 당나라의 충돌은 계속되었다. 신라는 당의 침략에 맞서 수성전을 펼치며 방어에 집중했지만, 672년 석문 전투(石門戰鬪)에서 신라군이 큰 피해를 입기도 했다.

 

2.3 매소성 전투와 기벌포 전투

전쟁의 절정은 675년에 벌어진 매소성 전투(買召城戰鬪)였다. 이 전투에서 신라군은 당나라 군대 20만 명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고, 30,000필의 군마와 수많은 병기를 노획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매소성 전투는 나당전쟁의 중요한 전환점이었으며, 당나라 군대의 전력을 약화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전쟁의 마지막 전투인 676년 기벌포 전투(伎伐浦戰鬪)는 신라군이 당나라 수군을 상대로 승리한 해전이었다. 당나라는 백제 지역에서 철수하려고 했으나, 신라군의 공격을 받아 패배했고, 4,000여 명의 당나라 군사가 전사했다. 이 전투로 신라는 당나라 군대를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3. 전쟁의 결과와 영향

 

3.1 당나라의 철수와 신라의 승리

나당전쟁은 676년 기벌포 전투에서 신라가 승리하면서 종결되었다. 당나라는 백제의 옛 땅에서 웅진도독부를 요동으로 철수시키고, 한반도에서의 지배 야망을 포기했다. 이로써 당나라는 한반도에서 확보했던 백제와 고구려 영토의 요충지를 잃었고, 신라는 한반도 남부에서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3.2 신라의 한반도 지배 확립

나당전쟁의 승리로 신라는 당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국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이로 인해 신라는 한반도 남부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하였고, 나당전쟁 이후 신라는 삼국통일(三國統一)을 완성하게 되었다. 비록 고구려의 북부 영토를 차지하지 못했지만,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옛 영토 대부분을 차지하여 강력한 통일 왕국을 형성할 수 있었다.

 

3.3 국제적 영향

나당전쟁은 동아시아 국제 정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당나라는 한반도에서의 지배력을 상실하고, 그 이후로도 한반도에 대한 직접적인 통치를 시도하지 않았다. 대신,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는 외교적 관계가 유지되었으며, 문화적으로도 교류가 계속되었다. 이 전쟁을 통해 신라는 당나라에 대한 군사적, 정치적 자주성을 확보하였고, 이후 신라의 안정적인 발전과 문화적 번영의 기초를 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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