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대한민국 돌아보기/한국역사 韓國歷史

5·18 광주 민주화 운동

by 경청 2024. 9. 22.
728x90
반응형

 

5·18 광주 민주화 운동(五一八光州民主化運動) 혹은 5·18 민주화 운동(五一八民主化運動),

광주민중항쟁(光州民衆抗爭)은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8일까지 광주시민과 전라남도민이 중심이 되어, 신군부 세력의 퇴진과 민주 정부 수립을 요구하며 전개한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입니다. 이 사건은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의 계엄령 확대와 독재에 반발하여 발생했습니다.

12.12 군사반란(軍事叛亂) 이후 전두환(全斗煥)과 신군부는 군사 권력을 장악하고 국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일련의 과정을 실행했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사망한 후,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에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국회 해산, 정치인 구속 등의 강경 조치를 내렸습니다. 이러한 독재적 조치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광주 시민과 대학생들의 분노를 일으켰고, 이로 인해 5월 18일부터 본격적인 시위와 항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의 시작(開始)**은 5월 18일 광주 전남대학교 학생들의 시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계엄군으로 투입된 **공수부대(空輸部隊)**가 학생들을 무차별적으로 구타하고, 시민들을 공격하자, 광주시민 전체가 시위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계엄군(戒嚴軍)**은 5월 21일에 전남도청 앞에서 집단 발포를 감행하여 수많은 시민을 학살하였고, 이에 시민들은 무장하여 저항하기 시작했습니다. 시민들은 경찰서와 예비군 무기고에서 총기를 탈취하여 시민군을 조직했고, 전남도청을 중심으로 저항을 지속했습니다.

계엄군의 집단 발포(集團發砲): 1980년 5월 21일, 전남도청 앞에서 계엄군이 시위대를 향해 조준 사격을 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항쟁은 더욱 격화되었습니다. 계엄군의 폭력적인 진압은 시민들에게 큰 분노를 일으켰고, 이로 인해 전국적으로 민주화 요구가 확산되었습니다.

광주 외곽 봉쇄 작전(封鎖作戰): 5월 21일 이후, 계엄군은 광주 외곽을 봉쇄하고 도시를 고립시켰습니다. 광주는 외부로부터 차단된 상태에서 시민군과 계엄군 간의 충돌이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시민들은 자발적인 협력을 통해 도시의 질서를 유지하고, 무장한 채로 계엄군에 맞서 싸웠습니다.

5월 27일 전남도청 진압(全南道廳鎭壓):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전남도청을 재진입, 무력으로 점령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시민군과의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시민군이 모두 체포되거나 사망했습니다. 이로 인해 항쟁은 종결되었으나, 이후에도 광주를 비롯한 전국에서 민주화 요구가 계속되었습니다.

5·18 민주화 운동은 10일 동안 지속되었고, 이로 인해 200여 명의 사망자와 수천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이 운동은 군부 독재에 맞서 싸운 시민들의 저항 정신을 보여주었고, 이후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995년 제정된 '5·18 민주화 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에 의해 희생자들의 명예가 회복되었으며, 1997년부터 5월 18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습니다. 또한, 2011년에는 5·18 민주화 운동 관련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世界記錄遺産)**에 등재되었습니다. 5·18 민주화 운동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민주화 운동으로 평가되며,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상징적인 사건으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이 운동은 군부 독재에 맞서 싸운 시민들의 용기와 희생을 기리는 의미로 매년 기념되고 있으며, 이후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비롯한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728x90
반응형

'대한민국 돌아보기 > 한국역사 韓國歷史'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당전쟁 羅唐戰爭  (0) 2024.09.22
여몽전쟁 麗蒙戰爭  (0) 2024.09.22
임진왜란 壬辰倭亂  (0) 2024.09.22
한국전쟁 韓國戰爭  (0) 2024.09.22
한국전쟁 참전국  (0) 2024.0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