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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돌아보기/한국역사 韓國歷史

여몽전쟁 麗蒙戰爭

by 경청 2024. 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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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고려(高麗)와 몽골 제국(蒙古 帝國) 간의 전쟁은 1231년(高宗 19年) 8월부터 1259년(高宗 46年) 3월까지 28년간 무려 9차례에 걸쳐 벌어진 대규모 전쟁이다. 이 전쟁은 고려의 저항 정신을 상징하는 대몽 항쟁(對蒙 抗爭) 혹은 **항몽 전쟁(抗蒙 戰爭)**으로도 불리며, 당시 고려의 국토는 잔혹한 침공과 파괴를 겪었다. 고려는 끝내 몽골 제국에 항복하였으며, 이 전쟁은 고려의 전쟁사에서 가장 암흑기로 기록된다. 특히, 몽골 제국의 압도적인 군사력 앞에서 고려는 전국토가 초토화되는 참담한 피해를 입었다. 몽골 제국의 요구에 따라 고려는 결국 항복하였고, 이 전쟁은 고려 역사상 가장 치열하고도 고통스러운 시기로 기억된다.

 

몽골 제국은 칭기즈 칸(成吉思汗)의 주도하에 유라시아 대륙을 장악하면서 빠르게 팽창하였다. 금(金)나라는 몽골 제국의 주요 목표 중 하나였으며, 몽골은 남송(南宋)과 연합하여 금나라를 멸망시켰다. 몽골의 금나라 멸망 이후, 거란족(契丹)의 잔당은 다시 세력을 키우기 위해 고려로 도망쳤고, 이에 몽골 제국은 거란의 잔당을 소탕하기 위해 고려와 협력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어난 **강동성 전투(江東城 戰鬪)**는 몽골과 고려가 연합하여 거란 잔당을 소탕한 대표적인 전투로, 이를 통해 몽골 제국과 고려는 일시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몽골 제국이 이후 고려에 과도한 공물을 요구하고, 몽골 사신들이 고려에서 무례한 행동을 일삼으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고려 내부에서는 점차 반몽 정서가 커졌고, 1225년(高宗 12年)에 몽골 사신 **저고여(箸告與)**가 고려 국경에서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양국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몽골은 이 사건을 구실로 고려에 책임을 묻고자 했으며, 이에 고려가 반발하면서 결국 양국의 국교가 단절되었고, 몽골의 고려 침략이 현실화되었다.

 

몽골 제국은 이미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작은 나라였던 고려를 끈질기게 복속시키려 했다. 몽골이 고려를 끊임없이 침공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그 중 하나는 몽골이 유라시아 대륙의 모든 영역을 제패하려는 야망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몽골 제국의 전략적 필요성과 당시의 국제 정세, 그리고 몽골 동부 장군들의 독자적 행동이 고려 침략의 원인으로 분석되기도 한다.

 

전개


몽골과 고려의 전쟁은 총 9차례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각 침략마다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3.1. 제1차 침략

일시(日時): 1231년(高宗 19年) 8월 ~ 1232년 3월
몽골의 첫 침공은 몽골의 오고타이 칸(窩闊台 汗)이 고려의 배후 위협을 차단하기 위해 3만 군사를 보내면서 시작되었다. 몽골군은 압록강을 넘어 고려의 북부 지역을 초토화하며 빠르게 남하했다. 고려군은 귀주성(龜州城), 자모산성(慈母山城), 충주성(忠州城)에서의 승리로 몽골군의 일부를 저지했지만, 안북성(安北城)에서 패배하며 전황이 불리해졌다. 몽골군은 결국 수도 개경(開京)을 포위하였고, 고려는 왕족을 인질로 보내는 조건으로 강화를 맺게 되었다. 특히, **귀주성 전투(龜州城 戰鬪)**에서 박서(朴犀) 장군과 김경손(金慶孫) 등의 활약으로 몽골군 1만여 명을 저지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충주성 전투에서 백성들과 노비들이 성을 지켜냈음에도, 전쟁 후 고려 관리들이 백성들을 처벌하는 사건이 발생하며 내부적으로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3.2. 제2차 침략

일시(日時): 1232년 8월 ~ 1232년 12월
몽골의 두 번째 침공은 강화도(江華島)로의 천도 이후 발생했다. 몽골군은 서북부 지역을 다시 침략했지만, 고려군은 **처인성 전투(處仁城 戰鬪)**에서 승려 김윤후(金允侯)가 몽골 장수 살리타이를 화살로 쏘아 죽이며 대승을 거두었다. 이에 몽골군은 퇴각하였고, 고려는 일시적으로 몽골의 침략을 막아냈다. 이 시기, 최우는 강화도 천도를 통해 몽골군과의 장기 항전 준비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3.3. 제3차 침략

일시(日時): 1235년 7월 ~ 1239년 4월
몽골 제국은 1234년 금나라가 멸망한 이후, 남송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고려를 3차례 침공하였다. 몽골군은 황해도, 경기도를 넘어 경상북도 지역까지 침략하며, 고려의 주요 도시들을 초토화했다. 이 시기 몽골군은 **황룡사(皇龍寺)**와 같은 문화재를 파괴하고, 많은 피해를 입혔다. 고려는 이에 맞서 죽주산성(竹州山城) 전투에서 몽골군을 대파하고, 몽골군의 철수를 이끌어냈다. 이때 고려 조정은 불교적 신앙을 기반으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새롭게 조성하며, 불교의 힘을 빌려 전쟁에서 승리하고자 했다.

 

3.4. 제4차 침략 ~ 제6차 침략

몽골 제국은 고려가 강화도에 거주하며 지속적으로 저항하자, 끊임없이 고려를 침략했다. 4차에서 6차에 걸친 침공에서 몽골군은 충주성, 다인철소(多仁鐵所) 등지에서 패배하며 철수했으나, 고려는 이로 인해 국토의 대부분이 피폐해졌다. 몽골군은 점점 더 잔혹해졌으며, 전 국토는 유린당했다.

 

3.7. 제7차 침략 ~ 제9차 침략

일시(日時): 1255년 9월 ~ 1259년 3월
몽골군은 7차, 8차, 9차에 걸쳐 고려를 지속적으로 침공하며, 전쟁의 규모가 더욱 커졌다. 몽골은 특히 강화도를 직접 공격하려는 시도를 했으나, 고려군의 저항과 내부 사정으로 인해 강화도 상륙에는 실패했다. 이 시기에 고려는 삼별초(三別抄)를 중심으로 반격을 시도했으나, 몽골군의 압도적인 군사력 앞에 어려움을 겪었다.

 

결과


고려는 결국 몽골 제국에 항복하며 1259년 전쟁이 종결되었다. 이 전쟁은 고려의 국토와 국민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남겼으며,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몽골군이 고려에서 약 206,800여 명을 포로로 끌고 갔다고 전한다. 또한, 고려의 수많은 건축물과 문화재가 소실되었고, 국토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고려는 전쟁 이후 몽골의 부마국(駙馬國)으로 전락하여 정치적으로 몽골에 종속되는 상황을 맞이했으나, 쿠빌라이 칸(忽必烈)과의 강화 협상에서 고려의 자주성을 어느 정도 보장받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고려는 "불개토풍(不改土風)", 즉 고려의 고유 전통과 체제를 유지하는 조건을 통해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이후 몽골과의 결혼 동맹이 성사되면서 고려의 충렬왕(忠烈王)이 쿠빌라이 칸의 딸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와 결혼하게 되었다. 이러한 동맹 관계는 고려의 자치권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고려는 여전히 몽골의 영향력 아래 놓인 상태였다. 결국, 1270년 고려는 몽골과의 강화가 공식적으로 성립되어 개경(開京)으로 환도하였고, 여몽전쟁은 39년 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삼별초는 이에 불복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진도와 제주도에서 몽골에 맞서 싸우다 1273년 완전히 진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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