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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돌아보기/한국인물 韓國人物

광개토대왕

by 경청 2010.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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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왕(廣開土王, 374년 ~ 413년?, 재위 : 392년? ~ 413년?)은 고구려의 제19대 이다. 이름은 담덕(談德) 또는 안(安)으로 고국양왕의 아들이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 국강상광개토지호태성왕(國崗上廣開土地好太聖王) 등의 시호가 전해지며, 남, 북한 사학계에서는 민족주의적 관점으로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또는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한 광개토왕릉비에는 연호인 영락(永樂)을 왕호로 사용한 영락태왕(永樂太王) 이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중국일본 등지에는 호태왕(好太王)으로 알려져 있다.

 

386년에 태자로 책봉되었고 392년(광개토왕릉비에 따르면 391년)에 즉위하였다. 연호는 영락(永樂)으로 한국사 최초의 연호이다. 광개토왕은 즉위한 직후부터 백제(百濟)와의 전쟁에 주력하였다. 392년 7월에 백제를 공격하여 석현성(石峴城) 등 10개 성을 함락하였으며, 10월에는 백제 북방의 중요한 요충지였던 관미성(關彌城)을 점령하였다. 백제는 빼앗긴 성을 회복하기 위해 계속해서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광개토왕은 백제의 공격을 393년에는 관미성, 394년에는 수곡성(水谷城), 395년에는 패수(浿水)에서 격퇴하였으며, 394년에 백제의 침략을 방비하기 위해 남쪽 변경에 7개의 성을 쌓았다. 396년에는 대대적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아리수(阿利水) 이북의 58개 성, 700여 개 촌락을 공략하고 위례성(慰禮城)을 포위하였다. 이에 백제 아신왕(阿莘王)이 항복하여 아신왕의 동생과 백제의 대신 10명을 인질로 받아 개선하였다. 이후 백제가 (倭)에 태자를 인질로 보내는 등 왜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에 적대적인 행동을 취하자 광개토왕은 399년평양(平壤)으로 순행하였다.

 

392년 이후 고구려와 동맹관계에 있던 신라(新羅)는 이무렵 백제와 동맹한 가야 및 왜의 공격을 받아 위태로운 지경에 빠졌기 때문에 평양으로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하였다. 광개토왕은 400년에 신라에 구원군을 파견하여 왜군을 물리치고 신라를 속국으로 삼았다. 404년에는 대방(帶方)으로 쳐들어 온 왜군을 궤멸시켰다. 한편 광개토왕은 모용씨(慕容氏)의 후연(後燕)과도 치열한 전쟁을 치렀다. 즉위 초에는 후연과 우호관계를 맺어 396년에는 후연의 책봉을 받고, 400년에는 사절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400년 2월에 후연왕 모용성(慕容盛)이 신성(新城)과 남소성(南蘇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700여 리의 땅을 탈취하면서 양국의 관계는 험악하게 변하였다. 이에 광개토왕은 보복전을 펼쳐 402년에 숙군성(宿軍城)을 공격하였으며 404년에도 후연을 공격하였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는 요동성(遼東城)을 비롯한 요동 지역을 장악하였으며 이를 회복하기 위해 쳐들어온 후연군을 405년 요동성, 406년 목저성(木抵城)에서 격파하여 요동 장악을 확고히 하였다. 또한 407년에는 5만 군대를 동원하여 후연 군대를 격파하여 막대한 전리품을 노획하고 돌아오는 길에 6개 성을 점령하였다. 후연을 견제하기 위하여 남연(南燕)과 우호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그러나 후연이 멸망하고 고구려계인 고운(高雲)이 북연(北燕)을 건국하자 408년에 우호관계를 맺음으로써 서쪽 국경을 안정시켰다. 그 외에도 392년 9월에는 거란(契丹)을 공격하여 500여 명을 노획하고 거란에 노획되었던 고구려인 1만여 명을 되찾아왔으며, 395년 거란의 일파로 추정되는 비려(碑麗)를 공격하여 염수(鹽水) 일대의 3개 부락과 600~700개 영(營)을 격파하고 많은 가축을 노획하였다. 또한 398년에는 숙신(肅愼)을 정벌하여 복속시켰으며 410년에는 동부여(東夫餘)를 공격하여 굴복시켰다.

 

광개토왕은 내치에도 힘썼다. 광개토왕 대는 평양을 크게 중시하여 393년에는 9개의 절을 평양에 창건하고 399년에는 왕이 직접 평양에 행차하기도 하였다. 409년에는 나라 동쪽에 독산성(禿山城) 등 6개 성을 쌓고 평양의 민호를 옮겨 살게 하였으며 다시 남쪽으로 순행하였다. 또한 역대 왕릉의 정비에 힘써 수묘인(守墓人) 제도를 정비하고 실시할 것을 장수왕에게 유언하였다. 이러한 내치로 광개토왕릉비에는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편안하였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라 칭송하는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413년(광개토왕릉비에 따르면 412년)에 서거하니 장수왕은 414년능비를 세우고 유언에 따라 수묘인을 두어 왕릉을 관리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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