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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돌아보기/한국인물 韓國人物

장보고 장군

by 경청 2010.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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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은 궁복(弓福)·궁파(弓巴). 일본 승려 엔닌[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는 장보고(長寶高)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생애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지만 서남해안 지방의 토호 출신일 가능성이 크며, 장씨 성은 당나라에 있을 때 칭한 것으로 추정된다. 무예에 자질이 있어 당나라로 건너가 서주(徐州)의 무령군(武寧軍) 소장(小將)이 되었다. 당에서 귀국한 뒤 828년(흥덕왕 3) 왕에게 청해(淸海)를 진수(鎭守)할 것을 청했다.
당시 서남해안에서는 당의 해적들이 신라인을 노략질하여 노비로 팔거나 무역선을 약탈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그는 왕의 허락을 받아 군사 1만 명을 모아 청해진(淸海鎭 : 지금의 완도)을 건설했다. 청해진은 7세기말에서 8세기초에 걸쳐 설치된 군진(軍鎭)의 하나이지만 건설 당초부터 독자적인 성격이 강했다. 그에게 내려진 대사(大使)라는 직명도 다른 군진의 진두(鎭頭)·두상(頭上) 등 신라의 정규 관직과는 다른 것이었다는 점도 이러한 사실을 말해준다.


청해진이 건설된 뒤 그는 해적을 소탕하여 서남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했고, 당·신라·일본을 잇는 해상무역로를 통한 무역활동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신라 지배체제의 외곽적 존재로서 해상무역을 통해 일종의 해상왕국을 형성한 그는 당나라에 견당매물사(遣唐賣物使)와 함께 교관선(交關船)이라는 무역선을 보내 교역활동을 했다. 840년(문성왕 2)에는 일본에 회역사(廻易使)를 파견하여 서신과 물건을 보냈다. 일본측은 이를 사교(私交)라 하여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무역은 허용했고, 그 사자와 이충(李忠)·양원(楊圓) 등에게 식량을 지급하기도 했다. 그의 세력은 국제적으로 극히 번성하여 중국에 유학한 일본 승려 엔닌은 그에게 정중한 편지를 써서 귀국할 때의 뱃길을 부탁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무역활동을 통해 확보한 경제력을 배경으로 중국의 산둥 성[山東省] 원덩 현[文登縣] 츠산춘[赤山村]법화원(法華院)이라는 절을 세웠다. 이곳에는 500석을 수확하는 장전(莊田)이 속해 있었는데, 많은 승려가 머물며 정기적으로 법회를 열었고, 청해진과의 연락기관 구실도 했다.

 

그는 경제력과 무력을 배경으로 중앙의 권력쟁탈전에도 개입하게 되었다. 836년(흥덕왕 11) 왕위계승분쟁에서 패한 김우징(金祐徵)이 청해진으로 와 그에게 의탁했다. 838년(희강왕 3) 희강왕이 피살되고 민애왕이 즉위하자 김양(金陽)은 군사를 모집하여 청해진으로 와서 먼저 와 있던 김우징을 만나 장보고에게 도움을 청했다. 장보고는 정년(鄭年)으로 하여금 군사 5,000명을 이끌고 김양과 함께 경주로 진격하게 했다. 이들은 중앙군을 물리치고 경주에 침입하여 민애왕을 살해하고 김우징을 신무왕으로 즉위시켰다. 신무왕은 장보고를 감의군사(感義軍使)로 삼고 식읍(食邑) 2,000호를 봉해주었다. 신무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문성왕은 즉위와 함께 그를 진해장군(鎭海將軍)으로 삼고 장복(章腹)을 내렸다. 그러나 진골귀족들은 그가 중앙정부에서까지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845년(문성왕 7)에 왕이 장보고의 딸을 차비(次妃)로 들이려 했으나 진골귀족들은 그가 '해도인'(海島人)이라는 이유로 반대하여 성사되지 못했다. 그러자 그는 이듬해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중앙정부는 무력으로 그를 토벌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한때 장보고의 부하였던 염장(閻長)을 자객으로 보내 그를 살해하게 했다. 청해진의 세력은 그뒤에도 얼마 간 유지되었으며, 851년에야 청해진을 없애고 주민을 벽골군(碧骨郡 : 지금의 김제)으로 옮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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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는 청년기에 당나라에 건너가 생활하다가 서주 무령군에서 군에 들어가 장교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 중국의 동해안 지역에는 많은 신라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들 중에는 양주, 소주, 명주 등지에서 아라비아, 페르시아 상인과 교역하는 한편, 중국과 신라, 일본으로 내왕하면서 국제무역에 종사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해안지역 출신으로 바다에 익숙하였던 장보고는 이러한 해상무역에 대하여 깊은 인상과 이해를 얻었고, 스스로 해상권을 통괄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키워볼 야망을 불태웠다. 828년 귀국한 장보고는 왕에게 남해의 해상교통의 요지인 완도에 해군기지를 건설하여 황해의 무역로를 보호하고 해적을 근절시킬 것을 주청하였다. 왕의 승인을 받아 지방민을 규합하여 완도에 청해진을 건설하였다. 청해진을 건설한 뒤 곧 해적을 소탕하여 동지나해 일대의 해상권을 장악하였고, 이 해상권을 토대로 당, 신라, 일본을 잇는 국제무역을 주도해나갔다. 장보고는 무역활동과 함께 외교교섭까지 시도하였다. 840년 무역선과 함께 회역사를 파견하여 일본 조정에 서신과 공물을 보냈고, 당나라에는 견당매물사의 인솔하에 교관선을 보내었다. 회역사와 견당매물사의 칭호가 붙은 교역사절을 파견하였던 사실은 독자적인 세력집단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일본의 지방관과 승려 엔닌이 장보고에게 서신을 보내어 귀국을 보살펴줄 것을 탄원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일본, 신라, 당을 잇는 당대의 해상교통로에서 장보고의 위세가 국제적으로 인정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청해진은 이러한 해상활동을 토대로 큰 지방세력으로 성장하였고, 이에 위협을 느낀 중앙정부는 장보고를 암살하게 된다. 청해진 세력은 장보고가 죽은 뒤에도 얼마간 유지되어 일본에 무역선과 회역사를 보내에 교역을 계속하였지만 곧이어 중앙군의 토벌을 받아 완전히 궤멸되었다.

 

851년 문성왕은 청해진의 주민을 벽골군(지금의 김제)에 이주시키고 청해진을 없애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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