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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돌아보기/한국인물 韓國人物

김수환 추기경

by 경청 2010.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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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金壽煥)은 1922년 대구 남산동에서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 김보현(金寶鉉)은 로마 가톨릭을 신봉하며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충청도 논산 연산에서 관군에게 순교할 만큼 대대로 독실한 가톨릭 집안이었다. 김수환의 아버지 김영석(金永錫)은 박해를 피해 떠돌며 옹기를 팔았고, 경상도 칠곡군 장자골에서 정착한 후 서중하(徐仲夏)와 결혼하였다. 그의 부모는 여덟 명의 자녀들이 모두 성직자가 되기를 바랐으나, 김수환과 넷째 형 김동환(金東煥)만이 그 꿈을 이뤘다.

 

김수환은 다섯 살 때 가족과 함께 군위로 이주하였고, 군위 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보통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사망하였고, 어머니 서중하는 자식들을 엄하게 키우며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라고 강조하였다. 김수환은 어머니가 엄격했지만 자녀들에게는 먹는 것과 입는 것을 부유한 집처럼 해주었다고 회고하였다. 그의 어린 시절 꿈은 장사꾼이 되는 것이었으나, 진학과 신앙의 영향으로 성직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김수환은 군위 보통학교 졸업 후 대구로 이주하여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부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에 진학하였다. 이후 동성 상업학교로 편입하여 학업을 계속하였다. 1941년 김수환은 천주교 대구교구 장학생으로 일본 조치 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하였으나 독립투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일본 유학 시절, 친일 성향의 학생들과 교수들의 차별에 좌절했으나, 독일인 로마 가톨릭 사제의 격려로 학업을 계속하였다. 1944년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일본에서 훈련을 받았고, 1946년 제2차 세계 대전 후 귀국하여 서울 성신대학에 편입하였다.

 

김수환은 1951년 9월 15일 대구 계산동 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받았고, 안동 성당에서 첫 사목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대구교구 비서, 재경부장, 해성병원 원장 등을 거쳐 1956년 독일로 유학을 떠나 신학과 사회학을 전공하였다. 1966년 김수환은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천주교 마산교구 초대 교구장 주교로 임명되었고, 1968년 서울대교구장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1969년 3월 28일, 김수환은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서임되었고, 세계 최연소 추기경이 되었다. 그는 이후 30년 동안 서울대교구장으로 재임하며 한국 천주교와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80년대 군사 정권에 맞서 민주화와 인권을 옹호하며 광주 민주화 운동과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에 대해 강도 높게 비판하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2009년 선종 후 각막을 기증하며 생명 존중의 가르침을 남겼다.

 
김수환 추기경의 영향력은 그가 성직자로서만이 아니라 사회적 지도자로서도 두드러졌다. 그는 1970년대와 1980년대의 군사정권 시기에도 꾸준히 인권과 정의를 외쳤으며, 특히 민주화 운동에 큰 기여를 하였다.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많은 이들이 고통받는 상황을 목격한 그는 "개인적으로 가장 고통을 겪었던 시기"라고 회고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나아지지 않자 무력감을 느꼈다고 밝혔다.
 

그는 1987년 6월 항쟁 당시 명동성당에 들어온 시위대를 보호하기 위해 경찰의 진입을 막으며 "경찰이 들어오면 내가 맨 앞에 있을 것이다"라고 단호하게 선언하였다. 이로 인해 명동성당은 그 시위대를 위한 안전한 공간이 되었고, 천주교회는 당시 한국 민주화 운동의 중요한 지지 기반이 되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단순히 종교적 역할을 넘어서, 한국 사회의 정의와 공동선을 위한 목소리를 끊임없이 냈다. 1987년 이후에는 빈민 사목을 중심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한 활동을 확대하였으며, 복지기관을 150개나 설립하는 등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 앞장섰다. 이는 그가 단순한 종교 지도자가 아니라, 실천하는 사회 운동가로서 존경받는 이유였다.

 

그는 사형제와 낙태 문제에도 생명 존중의 입장을 견지하였다. 2001년에는 사형수들을 위해 직접 미사를 집전하며 사형제 폐지를 주장했고, "생명은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또한, 그의 이러한 생명 존중 사상은 사후 각막 기증으로 이어져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장기 기증 운동이 활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선종 후에도 한국 사회에 깊은 울림을 남겼다. 그의 가르침과 생애를 기리는 다양한 서적과 평전이 출간되었고, 그의 말과 가르침은 사회 각계에 영향을 미쳤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라는 그의 마지막 메시지를 담은 스티커는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그의 묘소는 추모객들로 끊이지 않는 장소가 되었다.

 

그가 생전에 남긴 말과 글은 한국 천주교회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큰 울림을 주었고, 그의 삶은 한국 근현대사의 중요한 이정표로 남아 있다

 

저서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분도출판사, 1981)

《평화를 위한 기도》(1981)

《이 땅에 평화를》(햇빛출판사, 1988)

《참으로 사람답게 살기위하여 - 김수환 추기경의 세상 사는 이야기》(사람과 사람, 1998)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 (사람과 사람, 1999)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사람과 사람,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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