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대한민국 돌아보기/한국인물 韓國人物

청산리 김좌진장군 金佐鎭

by 경청 2024. 10. 8.
728x90
반응형

 

김좌진(金佐鎭, 1889년 11월 24일 ~ 1930년 1월 24일)**은 대한제국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기의 군인으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현재의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군인의 길을 걸었으며, 특히 1920년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하며 승리를 이끈 명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김좌진은 김동삼, 오동진과 함께 ‘독립운동의 3대 맹장(猛將)’으로 불렸다. 그러나 그의 삶은 비극적으로 끝났으며, 1930년 1월, 공산주의자 박상실에 의해 암살되었다. 본관은 신안동, 자는 명여(明汝), 호는 백야(白冶)이며, 그는 조선 명문가 출신으로 김상용의 11대손이다.

초기 생애와 교육 사업

김좌진은 1889년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서 태어났다. 세 살 때 아버지 김형규를 여의었지만, 그의 가문은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있었기에 생활의 어려움은 없었다. 다만 아버지 없이 자라는 아이로 손가락질을 받지 않기 위해 어머니 한산 이씨의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이러한 교육은 김좌진의 강한 책임감과 리더십을 길러주었다. 1904년에는 해주 오씨 오숙근과 혼인하였고, 이듬해인 1905년, 17세의 나이에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조선은 국권을 잃어가는 위기에 처해 있었고, 김좌진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집안의 노비들을 해방시키고, 자신의 토지를 그들에게 분배하는 등 혁신적인 행보를 보였다. 이는 당시의 상류층에서 보기 드문 일이었으며, 그의 강한 민족의식과 인간애를 반영한 행동이었다. 또한 그는 독립운동뿐만 아니라 교육사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07년, 충청도 지역의 계몽을 목표로 ‘호명학교’를 설립하고, 자신의 재산을 정리해 학교 운영에 충당하며, 자신의 집을 학교 교사로 제공하였다. 이는 그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대표적인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김좌진은 교육을 통해 민족의 자립과 독립을 준비하고자 했으며, 홍성에 대한협회 지부와 기호흥학회를 조직해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다. 1909년에는 기호흥학회 장학재단을 설립하고, 한성신보의 이사로도 활동하면서 민족 계몽과 교육에 헌신했다. 안창호, 이갑 등과 함께 서북학회를 세우고, 오성학교의 교감으로 재직하며 청년교육에도 힘을 쏟았다.

독립운동과 청산리 전투

1911년, 김좌진은 독립군 사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자금을 모으던 중,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2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감옥에서 그는 김구를 만나며 독립운동에 대한 강한 의지를 다졌고, 출소 후에도 대한광복단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지속했다. 1918년에는 만주로 망명해 무오독립선언에 서명하였고, 이후 북로군정서 사단장으로 임명되어 본격적인 항일 무장투쟁을 이끌게 되었다. 1920년 10월 21일, 김좌진은 역사적인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독립군 연합 부대를 지휘하여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는 한국 독립운동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무장 투쟁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독립군의 기세를 크게 올렸다. 당시 일본군은 약 3,000여 명의 병력으로 독립군을 공격했지만,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은 철저한 전략과 용맹으로 일본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청산리 전투 이후 김좌진은 북만주로 이동하여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고 독립군의 재건을 위해 힘썼다. 그러나 1921년 자유시 참변을 피하면서도, 계속해서 북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이어나갔다.

말년과 암살

1925년, 김좌진은 신민부를 창설하고 군사위원장 겸 사령관으로 활동하면서 독립군을 양성하는 데 전념했다. 북간도의 목릉현에 성동사관학교를 설립해 독립운동가들을 체계적으로 훈련시켰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국무위원으로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독립군 양성에 집중했다. 그러나 1929년, 민족주의 계열과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 간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김좌진은 공산주의자들로부터 표적이 되었다. 1930년 1월 24일, 그는 고려공산청년회 회원이었던 박상실에 의해 피살되었다. 그의 마지막 유언은 "할 일이 너무도 많은 이때에 내가 죽어야 하다니. 그게 한스럽다"라는 말이었다. 김좌진의 암살은 당시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간의 갈등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를 암살한 박상실은 얼마 후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김좌진의 유해는 암살 직후 임시로 홍성에 매장되었으나, 1957년 그의 아들 김두한에 의해 정식으로 안장되었다. 그의 죽음은 독립운동사에 큰 충격을 주었고, 그는 이후 독립운동의 상징적 인물로 기억되었다.

사후 평가와 유산

김좌진이 사망한 후, 1947년 그의 추모회가 열렸으며,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리기 위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그의 생가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76호로 지정되었으며, 1999년에는 ‘백야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가 설립되어 그의 유산을 기리고 있다. 또한 2013년, 대한민국 해군은 손원일급 잠수함 4번함에 ‘김좌진함’이라는 이름을 붙이며 그를 기념하였다. 김좌진은 독립운동 뿐만 아니라 교육과 민족 자립을 위해 헌신한 인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대표적인 사례로 남아 있다. 그는 무장 투쟁과 계몽운동을 통해 일제에 맞서 싸웠으며, 그의 정신은 후세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728x90
반응형

'대한민국 돌아보기 > 한국인물 韓國人物' 카테고리의 다른 글

16좌 완등 - 엄홍길  (0) 2024.10.08
윤봉길의사 尹奉吉  (0) 2024.10.08
녹두장군 전봉준 全琫準  (0) 2024.10.08
트로트 가수 남진 金南鎭  (0) 2024.10.06
김일 선수 金一  (0) 2024.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