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김수로왕과 가락국 탄생
수로왕의 탄생 신화와 가락국의 역사에 대한 전설은 한국 고대사의 뿌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김해김씨의 시조로서 수로왕의 이야기는 그의 후손들이 대대로 자부심을 느껴온 역사적 유산이며, 김해 지역의 전통과 문화의 뿌리가 됩니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전해지는 수로왕과 가락국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신화적 요소와 역사적 사실이 교차하는 독특한 고대사의 한 장을 발견하게 됩니다.
1. 김해김씨의 본관 - 김해(金海)
‘김해’는 오늘날 경상남도 김해시에 해당하는 지역의 지명으로, 고대 가야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등의 문헌에 따르면, 이 지역은 가락국이라는 독자적인 왕국이 존재했던 곳으로, 수로왕이 그 창시자입니다. 가락국은 한반도 남해안의 변한(弁韓) 지역에서 성장한 연맹 왕국으로, 특히 구지봉(龜旨峰)을 중심으로 한 김해 일대에서 문명을 이루었습니다. 가락국은 그 후 신라에 병합되었고, 532년 신라 법흥왕이 가락국을 금관군(金官郡)으로 편입하면서부터 '김해'라는 이름이 행정적으로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신라 경덕왕 시기에는 금관군이 ‘김해소경(金海小京)’이라는 명칭을 얻으며 양주(良州)의 관할로 편입되었고, 고려 시대에 이르러 ‘김해부(金海府)’로 승격되었습니다. 이후 김해는 여러 차례 승격과 강등을 거쳐 조선 시대에 김해도호부로 자리잡았고, 이후 오늘날의 김해시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 과정은 김해김씨의 본관인 김해가 단순히 지리적 명칭이 아니라, 고대 가야 왕국의 중심지로서 역사적 상징성을 지닌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김해김씨는 가락국을 세운 수로왕을 시조로 하여 이 지역을 본관으로 삼고 있으며, 그 유산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2. 수로왕의 탄생 신화
수로왕의 탄생 신화는 한국 고대 사회에서 왕권이 신성한 존재로부터 수여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서기 42년, 가락국의 아홉 촌장이 구지봉 정상에 모여 나라를 다스릴 왕을 하늘에 청하는 제의를 올렸습니다. 촌장들은 하늘의 뜻을 받들어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라”는 구지가(龜旨歌)를 불렀고, 그 노랫소리가 산을 울리자 하늘에서 금빛의 상자, 즉 금합(金盒)이 내려왔습니다. 이 상자 안에는 여섯 개의 황금 알이 담겨 있었는데, 다음 날 이 알들은 여섯 명의 소년으로 변했습니다. 그중 가장 먼저 깨어난 소년이 바로 ‘수로’라 불리며 가락국의 왕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수로왕의 이름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신성한 존재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수로(首露)’라는 이름은 ‘머리 수(首)’와 ‘이슬 노(露)’의 결합으로, 첫 번째 이슬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는 하늘에서 내려온 깨끗하고 신성한 존재임을 의미하며, 왕위의 신성성을 강조합니다. 수로왕은 왕위에 오르며 성씨를 ‘김(金)’으로 정했는데, 이는 그가 금합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기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신화는 당시 고대 한국 사회가 신성한 존재로부터 왕을 맞이하고, 통치자를 신적 존재로 받아들였다는 상징적 의미를 보여줍니다.
3. 가락국의 번영과 역사적 발전
수로왕은 가락국의 시조로서 나라를 다스리며, 특히 대가락(大駕洛)이라는 이름으로 왕국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지혜롭고 강력한 통치자로, 주변 부족과의 평화로운 교류를 통해 가락국의 번영을 이끌었습니다. 수로왕은 외교적 재능도 뛰어났으며, 이를 통해 가락국은 변한 지역의 다른 부족들과 연맹 관계를 맺고 상호 협력하는 연맹 왕국 체제를 형성했습니다. 수로왕은 인도 아유타국(阿踰陁國)의 공주 허황옥을 왕비로 맞이했는데, 허황옥은 15명의 선원과 함께 먼 바다를 건너왔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삼국유사에는 허황옥이 황금빛 상자를 타고 가야에 도착했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개인적 혼인 관계를 넘어, 당시 가야가 해외와 교역하며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허황옥의 도래는 고대 한국 사회에 불교를 비롯한 외래 문화가 전해졌다는 상징적 사건으로, 이후 가야 지역에 불교적 전통이 뿌리내리는 계기가 되었다고도 해석됩니다. 수로왕과 허황옥 사이에서 10명의 아들과 2명의 딸이 태어났으며, 이들은 가락국과 그 후손들의 계보를 이어갔습니다. 특히 수로왕의 후손 중 김무력은 신라에서 높은 관직인 각간(角干)을 역임하였고, 김해김씨 후손들이 신라 왕실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락국은 10대 구형왕의 시기에 신라에 병합되며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4. 불교와 수로왕 후손들의 수행
수로왕과 허황옥의 혼인은 고대 한국에 불교가 전래되는 중요한 계기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허황옥의 오빠 장유화상(長遊和尙)은 가야에 불교를 전파한 인물로 전해지며, 그는 수로왕의 아들들 중 7명과 함께 가야산에 들어가 불교 수행을 이어갔습니다. 이들은 불교에서 이상적 경지에 도달한 존재, 즉 생불(生佛)로 불리며, 각각 금왕광불(金王光佛), 금왕당불(金王幢佛), 금왕상불(金王相佛) 등의 호칭을 받았습니다. 칠불암(七佛庵)은 이들 7명의 왕자가 성불하였다는 전설이 남아 있는 사찰로, 이곳은 가야 지역 불교의 발상지로 전해집니다. 수로왕은 자신의 아들들이 성불했다는 소식을 듣고 왕비와 함께 칠불암을 찾아 그들의 성불을 기념하며 예를 올렸다고 합니다. 칠불암은 이후 조선 시대까지 명맥을 이어오며 불교적 도량으로 자리매김했으며, 이 전설은 수로왕과 허황옥의 후손들이 불교적 깨달음을 통해 가야 지역에 불교 신앙이 뿌리내리게 했음을 나타냅니다.
5.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기록된 역사적 의미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기록된 수로왕과 가락국의 이야기는 단순히 신화에 그치지 않고, 당시 고대 한국 사회의 정치적·종교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수로왕의 신화는 그가 하늘의 계시를 받은 신성한 왕임을 강조하며, 이를 통해 가락국의 통치 정당성을 부여합니다. 또한, 허황옥과의 결합을 통해 외래 문화와 종교를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가락국이 개방적이고 외부와의 교류에 적극적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수로왕의 후손들은 신라와의 동맹 관계를 통해 김해김씨 가문이 발전하게 되었고, 이후 고려와 조선을 거치며 김해김씨 가문은 명문 가문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삼국유사에는 수로왕이 신라의 문무대왕과 연결되는 외가 혈통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김해김씨 가문이 신라와의 연계를 통해 신라 사회에서도 정치적 영향력을 가졌음을 보여줍니다. 수로왕과 가락국의 이야기는 고대 한국 사회에서 신적인 존재가 통치자와 연합체의 지도자로 받아들여진 사례이며, 이는 현대에도 김해김씨 후손들이 자부심을 갖는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은 김해김씨 가문의 뿌리이자 김해 지역의 정체성을 형성한 인물로, 그의 신화와 전설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후손들에게 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6, 가족관계
- 국왕 : 수로왕(首露王, 42~199 재위: 42~199)
- 왕비 : 허황옥(許黃玉, 33~189)
- 장남 : 거등왕(居登王, ?~253, 재위:199~253)
- 자부 : 모정부인(慕貞夫人)
- 손자 : 마품왕(麻品王, ? ~291, 재위: 253~291)
- 차남 : 거칠군 허석(居漆君 許錫) - 진례성(進禮城) 성주
- 3남 : 허명(許明)
- 4남 : 혜진(慧眞) - 금왕광불(金王光佛)
- 5남 : 각초(覺初) - 금왕당불(金王幢佛)
- 6남 : 지감(智鑑) - 금왕상불(金王相佛)
- 7남 : 등연(等演) - 금왕행불(金王行佛)
- 8남 : 주순(柱淳) - 금왕향불(金王香佛)
- 9남 : 정영(淨英) - 금왕성불(金王性佛)
- 10남 : 계영(戒英) - 금왕공불(金王空佛)
- 장녀 : 영안공주(永安公主) - 태사 배열문(裴烈文)의 처
- 외손 : 배숙(裴肅)
- 차녀 : 태자 석구광(昔仇光)의 처
- 외손녀 : 마정부인(摩貞夫人), 김알지(金閼智)의 처
- 처남 : 장유화상(長遊和尙) 그가 가야에 불교를 전파했다 한다. 다른 이름은 보옥선인(寶玉仙人)
- 사돈 : 탈해 이사금(脫解尼師今)
시조(始祖)는 김수로왕(金首露王)이다.
가락국(駕洛國)에는 본래(本來)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신천간, 오천간, 신귀간 등 아홉 촌장이 각 지방(地方)을 다스렸는데 서기 42년 3월에 구지봉(龜旨峰)에서 이상한소리가 났다. 아홉 촌장과 사람들이 올라가자 "산봉우리에 흙을파며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라. 만약(萬若) 머리를 내지 않으면 구어 먹겠다.'라고 하면서 춤을 추면 곧 임금을 맞이할 것이다."라고 하자 그대로 하였더니, 자줏빛 줄이 하늘에서 땅에 닿아 있었다. 그 끈의 끝에 붉은 보자기에 금으로 만든 상자가 싸여 있으므로 이것을 열어 보니 둥근 황금(黃金)알 여섯 개가 있었다.
이것을 아도간의 집으로 가져가자 다음날 이 알이 여섯 어린아이가 나왔는데, 제일먼저 나온 아이 이름을 김수로(金首露, 42~199.3.23)로 하고 그달 보름에 왕으로고 나라 이름을 가락(대가야)이라하고,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기 5가야(伽倻)의 임금이 되었다고 한다. - 이상은 "삼국유사" 중에서 -
그중 먼저 나온 수로(首露)는 금알에서 나왔다 하여 성(性)을 김(金)으로 하였다. - 이상은 "개황력(開皇曆)" 중에서 -
이 수로왕(首露王)을 시조(始祖)로 하는 성씨(姓氏)가 바로 김해김씨(金海金氏)이다. 김해는 가락국(駕洛國)의 고도로서 지명(地名)도 여러 가지로 변했으나 고려(高麗) 충선왕(忠宣王) 때 김해(金海)부가 설치(設置)됨으로써 본관(本貫)을 김해(金海)로 하였으며 가락김씨(駕洛金氏)라 고도 불리 우고 있다.
수로왕(首露王)이 즉위(卽位) 7년에 아유타국(현재 인도 중부지방(中部地方)의 고대국가)의 공주(公主)인 허황옥(許黃玉, 33~189.3.1)을 왕비(王妃)로 맞이하여 10남 2녀를 낳았는데 맏아들은 김씨(金氏)로 왕통(王統)을 잇고 두 아들은 왕비(王妃)의 간곡한 요청(要請)으로 왕비(王妃)의 성인 허씨(許氏)인 (태인허씨(泰仁許氏))를 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일곱 아들은 불가(佛家)에 귀화(歸化)하여 하동 7불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허씨(許氏)에서 갈라져 나온 인천이씨(仁川李氏)가 있으며 세 성씨(姓氏)가 다 같은 혈족(血族)이라며 종친회(宗親會)도 '가락중앙종친회(駕洛中央宗親會)'로 하였다.
김해 김씨(金海 金氏)의 중시조(中始祖)는 수로왕(首露王)의 12세손(世孫)인 김유신(金庾信) 장군(將軍)이다. 김유신(金庾信)은 가락국(駕洛國) 마지막 왕인 구형왕(仇衡王)의 증손(曾孫)자이며 무열왕(武烈王)의 딸 지소 부인(智炤夫人)과 혼인(婚姻)하였다. 할아버지는 신라(新羅)의 장군(將軍)이자 각간(角干)인 김무력(金武力, 구형왕(仇衡王)의 막내 아들)이고, 아버지는 당대(當代)의 이름난 장군(將軍)인 김서현(金舒玄), 어머니는 진흥왕(眞興王)의 동생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萬明)이다.
2. 세계도
1 김수로왕 金首露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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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도왕 道王 |
2 허씨 許氏 |
2 하동칠불 河東七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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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성왕 成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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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덕왕 德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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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명왕 明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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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신왕 神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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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혜왕 惠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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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장왕 莊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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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숙왕 肅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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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양왕 讓王 |
10 김탈지 金脫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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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김세종 金世宗 |
11 김무력 金武力 |
11 김무득 金武得 금릉 김씨 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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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김솔우 金率友 |
12 김서현 金舒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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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흥무대왕 興武大王 김유신 金庾信 |
13 김흠순 金欽純 |
13 김보희 金寶姬 |
13 문명왕후 文明王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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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김삼광 金三光 |
14 김원술 金元述 진주 김씨 시조 |
14 김원정 金元貞 |
14 김장이 金長耳 |
14 김군승 金軍勝 |
14 김반굴 金盤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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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김윤중 金允中 |
15 김윤문 金允文 |
15 김선 |
15 김영윤 金令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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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김장청 金長淸 |
16 김암 金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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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김웅원 金雄元 |
17 김웅윤 金雄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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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김경주 金擎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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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김성해 金成海 |
19 김성대 金成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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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김정철 金挺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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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김수윤 金琇胤 |
21 김옥윤 金玉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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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김천수 金天授 |
22 김천여 金天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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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김상좌 金商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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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김호 金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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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김화제 金華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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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김진유 金振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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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김승의 金承意 |
27 김계의 金繼意 |
27 김진의 金進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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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김천정 金天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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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김항령 金恒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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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김수성 金洙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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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김상흠 金商欽 |
31 김상현 金商賢 |
31 김상인 金商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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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김성우 金成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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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김일서 金一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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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김광국 金匡國 |
34 김안국 金安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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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김종백 金宗栢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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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김수 金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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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김이탁 金以琢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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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김서천 金瑞天 |
38 김서지 金瑞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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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김양철 金陽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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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김시추 金是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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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김진국 金鎭國 |
41 김정국 金定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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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김규상 金奎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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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김도협 金道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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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김탕우 金湯雨 |
44 김상우 金商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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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김만서 金萬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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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김사맹 金師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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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김상주 金相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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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김방직 金邦直 |
48 김용직 金龍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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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김익섬 金益銛 |
49 김관 金管 판도판서공파 (삼현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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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김주국 金柱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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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김절경 金晢卿 |
51 김목경 金牧卿 금녕군파 (경 파) |
51 김익경 金益卿 감무공파 (사군파) |
3. 분파와 인물
- 경파(京派)[금녕군파(金寧君派)] - 김목경(金牧卿)
- 참판공파(參判公派): 김영견(金永堅)
- 횡성공파(橫城公派): 김영서(金永瑞)
- 안경공파(安敬公派): 김영정(金永貞)
- 석성공파(石城公派): 김영순(金永純)
- 호참공파(戶參公派): 김진서(金震敍)
- 참찬공파(參贊公派): 김달문(金達門)
- 봉상공파(奉常公派): 김현문(金顯門)
- 밀직사공파(密直使公派): 김창문(金昌門)
- 문간공파(文簡公派): 김저(金著)
- 밀직공파(密直公派): 김수(金秀)
-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 김란(金蘭)
- 사군파(四君派)[감무공파(監務公派)] - 김익경(金益卿)
- 생원공파(生員公派): 김련(金鍊)
- 도총관공파(都摠管公派): 김추(金錘)
- 생원공파(生員公派): 김구(金銶)
- 찬성공파(贊成公派): 김석(金錫)
- 상서공파(尙書公派): 김감(金鑑)
- 공간공파(恭簡公派): 김조(金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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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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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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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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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김해김씨의 분포
대한민국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성씨이며, 김씨 중에서도 가장 많은 41.7%를 차지하고 있다. 2000년 서울 81만 5천 783명, 부산 40만 7천 41명, 대구 19만 9천 252명, 인천 20만 7천 736명, 광주 14만 8천 736명, 대전 9만 6천 887명, 울산 10만 4천 627명, 경기 71만 8천 661명, 강원 10만 7천 612명, 충북 8만 6천 978명, 충남 14만 151명, 전북 17만 3천 712명, 전남 26만 8천 525명, 경북 23만 7천 826명, 경남 35만 12명, 제주 6만 1천 395명이다. 부산과 경남지역에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다. 2000년 4,124,934명, 2015년 4,456,700명으로 조사되었다.
구분
가야 수로왕계 김해 김씨 선김(先金)과 신라 김렴계 김해 김씨는 김해 김씨 후김(後金) 또는 김녕 김씨(金寧 金氏)로 구분한다. 또는 사성 김해 김씨는 우록 김씨(友鹿金氏)라고 한다.
동조 이성 이본
허씨 - 가락국 수로왕비 허황옥(許黃玉)을 연원으로 삼는 성씨다. 본관은 김해(金海), 양천(陽川), 태인(泰仁), 하양(河陽) 등이 있다.
인천 이씨 - 허황옥(許黃玉)의 23세손 아찬(阿湌) 허기(許奇)를 득성조라고 하고 상서좌복야 이허겸(李許謙)을 시조로 하며 태인 허씨에서 분관되었다.
동조 동성 이본
금릉 김씨 - 가락국 구형왕(仇衡王)의 셋째 아들 김무득(金武得)을 시조로 한다.
진주 김씨 - 김유신(金庾信)의 차남 김원술(金元述)을 시조로 한다.
무장 김씨 - 김수로왕의 56세손인 충절공(忠節公) 김선(金璇)을 시조로 한다. 일부 후손들은 김해김씨 장사군파로 칭하고 있다.
분적설
남양 김씨 - 김수로왕의 후예로 고려 의종 때 사람인 김적(金頔)을 시조로 한다.
웅천 김씨 - 김유신의 후예로 조선조에서 수의부위에 오른 김중재(金重材)를 일세조(一世祖)로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5. 2000년 전 허황옥의 신행길을 따라, 김해와 인도 우정의 상징
김해와 인도의 깊은 인연이 시작된 것은 2000년 전,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이 가야국의 김수로왕과 혼인을 결심하며 한국 땅에 첫 발을 내디뎠을 때입니다. 그 이후 김해와 인도는 오랜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잊히지 않는 유대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1999년, 인도의 아요디아 왕실 후손인 미쉬라 왕손 내외의 방한으로 두 나라의 인연이 다시 주목받았고, 이는 김해시와 아요디아시 간의 자매결연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결과, 인도 아요디아에 허황옥 기념공원이 조성되며 양국의 역사가 새롭게 조명되었습니다.
허황옥 기념공원은 아요디아의 중심을 흐르는 신성한 사라유 강변에 자리 잡았습니다. 허황옥과 김수로왕의 전설을 기리는 이 공원은,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제대로 관리되지 못한 채 녹슨 정문과 무성한 수풀만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빈민촌으로 둘러싸인 공원은 현지 주민들의 생계와도 별반 다르지 않은 방치된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하지만 김해와 인도의 우정을 상징하는 이 공원을 재정비하여 지역 사회에 긍정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인도의 유피 주정부와 김해시는 허황옥 기념공원을 중심으로 주변 지역을 특산품 생산 및 판매지구로 개발하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 개발이 완성되면 기념공원은 단순한 상징적 장소를 넘어, 빈민촌 주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삶의 터전이 될 것입니다. 이를 통해 허황옥의 이야기는 2000년을 뛰어넘어 오늘날에도 지역 사회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는 전설로 거듭날 것입니다.
한편, 김해시도 아요디아의 인연을 이어받아 한국의 불암동 서낙동강변에 대규모 인도풍 허왕후 기념공원 조성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2만 3,000㎡의 광활한 부지에 조성될 이 공원은 국·도·지방비 210억 원을 투입해 내년 말 준공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허황옥의 신행길을 중심으로 한 역사적 스토리텔링을 통해 국제적인 관광명소로 발전시키려는 포부를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이 공원 내에는 인도문화교류관도 함께 세워져, 한국과 인도의 문화적 교류를 더욱 강화할 예정입니다. 이 교류관은 가야테마파크 인도관에 보관 중이던 희귀 인도 유물들을 한데 모아 전시할 예정이며, 인도 정부도 다양한 유물 기증을 약속했습니다. 또한 2019년 인도 모디 총리가 방한 당시 김해시에 선물한 석가모니 보리수 묘목도 교류관에 옮겨져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것입니다.
허황옥 기념공원이 조성되는 김해시는 이 프로젝트가 단순히 두 나라의 과거를 기념하는 장소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걸쳐 양국의 우정을 이어가는 가교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김해 홍태용 시장은 “허황옥의 신행길을 국제적 관광 상품화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게 하고, 김해와 인도의 오랜 우정을 바탕으로 한 감동적인 스토리를 전달할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그 포부를 밝혔습니다.
이로써 김해와 아요디아, 두 도시는 20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허황옥과 김수로왕의 이야기를 되새기며, 양국의 문화와 역사가 현재의 상호 교류와 협력으로 연결되는 상징적 장소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6. 허왕후의 진짜 고향, 인도 북부가 아니라 남부 해안?
허왕후 묘 "보주태후허씨릉"
구산동 소재
서기 48년에 가야국의 시조 김수로왕에게 시집온 허황옥(許黃玉, 32~189)의 고향은 과연 어디일까? 지금까지 알려진 대로 인도 북부 갠지스강 중류의 아요디야(Ayodhya)가 아니라 남동부 해안의 같은 이름을 가진 아요디야 쿠빰(Ayodhya Kuppam)일 가능성이 더욱 높다는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허왕후가 “나는 인도 아유타국(阿踰陀國) 출신의 공주”라고 말한 바에 따라, 그동안 많은 학자들이 아유타국의 뿌리를 찾아왔고, 결국 인도 최대 주인 우타르프라데시(Uttar Pradesh)주의 아요디야를 허왕후의 출신지로 확정하게 되었다. 이는 아유타와 발음이 유사한 지명 가운데 아요디야가 가장 흡사했기 때문이다. 아요디야는 ‘싸움이 없는 곳’이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Sanskrit, 힌디어의 뿌리)로, 당시에는 그 발음이 ‘아요다(Ayodhya)’였다.
이에 따라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 가문 등이 주도하여 아요디야 지역에 ‘가락공원’을 조성하였고, 경남 김해시는 아요디야와 자매결연을 맺고 허왕후의 유적지를 기념하는 사업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인도에는 아요디야라는 지명이 두 곳 더 존재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중 하나는 인도 남동부 타밀나두주(州)의 해안가 마을 아요디야 쿠빰이다. 이러한 사실은 허왕후의 출신지가 인도 북부의 아요디야가 아니라, 남부의 아요디야 쿠빰일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허황옥이 인도 북부의 아요디야에서 출발했다면, 배를 타고 갠지스강을 거슬러 내려가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약 2000년 전의 항해 기술로는 강을 따라 동아시아로 향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반면, 남부 아요디야 쿠빰은 벵골만과 인접한 해안가 마을로, 바닷길을 이용해 동아시아로 항해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다. 또한, 《삼국유사》에 언급된 파사석탑(婆娑石塔)은 주로 인도 동부 해안에서 발견되는 특수한 돌로, 허왕후가 이 지역 출신임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여겨진다.
허왕후가 가야에서 사용한 언어와 타밀어의 유사성도 주목할 만하다. 타밀어와 우리말은 수백 개의 단어에서 유사성이 있으며, 어순도 비슷하다. 허왕후가 자신의 고향 말을 가야 사람들에게 전해준 것이 우리말에 남았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러한 언어적 유사성은 허왕후가 인도 남부 타밀나두 출신일 수 있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또한, 드라비다족(Dravidian)은 모계사회를 중심으로 형성된 문화였으며, 허왕후가 자신의 아들 중 두 명에게 허씨 성을 부여한 것도 이러한 전통의 영향으로 해석될 수 있다. 허왕후가 김해에 도착했을 때 지닌 비단과 장신구들도 아요디야 쿠빰 인근 지역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다양한 근거를 통해 필자는 허왕후의 출신지가 인도 북부의 아요디야가 아니라 남부의 아요디야 쿠빰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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