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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이야기

김해김씨1 - 기원과 변천사, 가락국의 수로왕에서 김해시까지

by 경청 2024. 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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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수로왕과 가락국 탄생

수로왕의 탄생 신화와 가락국의 역사에 대한 전설은 한국 고대사의 뿌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김해김씨의 시조로서 수로왕의 이야기는 그의 후손들이 대대로 자부심을 느껴온 역사적 유산이며, 김해 지역의 전통과 문화의 뿌리가 됩니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전해지는 수로왕과 가락국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신화적 요소와 역사적 사실이 교차하는 독특한 고대사의 한 장을 발견하게 됩니다.

1. 김해김씨의 본관 - 김해(金海)

‘김해’는 오늘날 경상남도 김해시에 해당하는 지역의 지명으로, 고대 가야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등의 문헌에 따르면, 이 지역은 가락국이라는 독자적인 왕국이 존재했던 곳으로, 수로왕이 그 창시자입니다. 가락국은 한반도 남해안의 변한(弁韓) 지역에서 성장한 연맹 왕국으로, 특히 구지봉(龜旨峰)을 중심으로 한 김해 일대에서 문명을 이루었습니다. 가락국은 그 후 신라에 병합되었고, 532년 신라 법흥왕이 가락국을 금관군(金官郡)으로 편입하면서부터 '김해'라는 이름이 행정적으로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신라 경덕왕 시기에는 금관군이 ‘김해소경(金海小京)’이라는 명칭을 얻으며 양주(良州)의 관할로 편입되었고, 고려 시대에 이르러 ‘김해부(金海府)’로 승격되었습니다. 이후 김해는 여러 차례 승격과 강등을 거쳐 조선 시대에 김해도호부로 자리잡았고, 이후 오늘날의 김해시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 과정은 김해김씨의 본관인 김해가 단순히 지리적 명칭이 아니라, 고대 가야 왕국의 중심지로서 역사적 상징성을 지닌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김해김씨는 가락국을 세운 수로왕을 시조로 하여 이 지역을 본관으로 삼고 있으며, 그 유산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2. 수로왕의 탄생 신화

수로왕의 탄생 신화는 한국 고대 사회에서 왕권이 신성한 존재로부터 수여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서기 42년, 가락국의 아홉 촌장이 구지봉 정상에 모여 나라를 다스릴 왕을 하늘에 청하는 제의를 올렸습니다. 촌장들은 하늘의 뜻을 받들어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라”는 구지가(龜旨歌)를 불렀고, 그 노랫소리가 산을 울리자 하늘에서 금빛의 상자, 즉 금합(金盒)이 내려왔습니다. 이 상자 안에는 여섯 개의 황금 알이 담겨 있었는데, 다음 날 이 알들은 여섯 명의 소년으로 변했습니다. 그중 가장 먼저 깨어난 소년이 바로 ‘수로’라 불리며 가락국의 왕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수로왕의 이름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신성한 존재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수로(首露)’라는 이름은 ‘머리 수(首)’와 ‘이슬 노(露)’의 결합으로, 첫 번째 이슬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는 하늘에서 내려온 깨끗하고 신성한 존재임을 의미하며, 왕위의 신성성을 강조합니다. 수로왕은 왕위에 오르며 성씨를 ‘김(金)’으로 정했는데, 이는 그가 금합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기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신화는 당시 고대 한국 사회가 신성한 존재로부터 왕을 맞이하고, 통치자를 신적 존재로 받아들였다는 상징적 의미를 보여줍니다.

3. 가락국의 번영과 역사적 발전

수로왕은 가락국의 시조로서 나라를 다스리며, 특히 대가락(大駕洛)이라는 이름으로 왕국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지혜롭고 강력한 통치자로, 주변 부족과의 평화로운 교류를 통해 가락국의 번영을 이끌었습니다. 수로왕은 외교적 재능도 뛰어났으며, 이를 통해 가락국은 변한 지역의 다른 부족들과 연맹 관계를 맺고 상호 협력하는 연맹 왕국 체제를 형성했습니다. 수로왕은 인도 아유타국(阿踰陁國)의 공주 허황옥을 왕비로 맞이했는데, 허황옥은 15명의 선원과 함께 먼 바다를 건너왔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삼국유사에는 허황옥이 황금빛 상자를 타고 가야에 도착했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개인적 혼인 관계를 넘어, 당시 가야가 해외와 교역하며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허황옥의 도래는 고대 한국 사회에 불교를 비롯한 외래 문화가 전해졌다는 상징적 사건으로, 이후 가야 지역에 불교적 전통이 뿌리내리는 계기가 되었다고도 해석됩니다. 수로왕과 허황옥 사이에서 10명의 아들과 2명의 딸이 태어났으며, 이들은 가락국과 그 후손들의 계보를 이어갔습니다. 특히 수로왕의 후손 중 김무력은 신라에서 높은 관직인 각간(角干)을 역임하였고, 김해김씨 후손들이 신라 왕실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락국은 10대 구형왕의 시기에 신라에 병합되며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4. 불교와 수로왕 후손들의 수행

수로왕과 허황옥의 혼인은 고대 한국에 불교가 전래되는 중요한 계기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허황옥의 오빠 장유화상(長遊和尙)은 가야에 불교를 전파한 인물로 전해지며, 그는 수로왕의 아들들 중 7명과 함께 가야산에 들어가 불교 수행을 이어갔습니다. 이들은 불교에서 이상적 경지에 도달한 존재, 즉 생불(生佛)로 불리며, 각각 금왕광불(金王光佛), 금왕당불(金王幢佛), 금왕상불(金王相佛) 등의 호칭을 받았습니다. 칠불암(七佛庵)은 이들 7명의 왕자가 성불하였다는 전설이 남아 있는 사찰로, 이곳은 가야 지역 불교의 발상지로 전해집니다. 수로왕은 자신의 아들들이 성불했다는 소식을 듣고 왕비와 함께 칠불암을 찾아 그들의 성불을 기념하며 예를 올렸다고 합니다. 칠불암은 이후 조선 시대까지 명맥을 이어오며 불교적 도량으로 자리매김했으며, 이 전설은 수로왕과 허황옥의 후손들이 불교적 깨달음을 통해 가야 지역에 불교 신앙이 뿌리내리게 했음을 나타냅니다.

5.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기록된 역사적 의미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기록된 수로왕과 가락국의 이야기는 단순히 신화에 그치지 않고, 당시 고대 한국 사회의 정치적·종교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수로왕의 신화는 그가 하늘의 계시를 받은 신성한 왕임을 강조하며, 이를 통해 가락국의 통치 정당성을 부여합니다. 또한, 허황옥과의 결합을 통해 외래 문화와 종교를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가락국이 개방적이고 외부와의 교류에 적극적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수로왕의 후손들은 신라와의 동맹 관계를 통해 김해김씨 가문이 발전하게 되었고, 이후 고려와 조선을 거치며 김해김씨 가문은 명문 가문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삼국유사에는 수로왕이 신라의 문무대왕과 연결되는 외가 혈통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김해김씨 가문이 신라와의 연계를 통해 신라 사회에서도 정치적 영향력을 가졌음을 보여줍니다. 수로왕과 가락국의 이야기는 고대 한국 사회에서 신적인 존재가 통치자와 연합체의 지도자로 받아들여진 사례이며, 이는 현대에도 김해김씨 후손들이 자부심을 갖는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은 김해김씨 가문의 뿌리이자 김해 지역의 정체성을 형성한 인물로, 그의 신화와 전설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후손들에게 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6, 가족관계

  • 국왕 : 수로왕(首露王, 42~199 재위: 42~199)
  • 왕비 : 허황옥(許黃玉, 33~189)
    • 장남 : 거등왕(居登王, ?~253, 재위:199~253)
    • 자부 : 모정부인(慕貞夫人)
      • 손자 : 마품왕(麻品王, ? ~291, 재위: 253~291)
    • 차남 : 거칠군 허석(居漆君 許錫) - 진례성(進禮城) 성주
    • 3남 : 허명(許明)
    • 4남 : 혜진(慧眞) - 금왕광불(金王光佛)
    • 5남 : 각초(覺初) - 금왕당불(金王幢佛)
    • 6남 : 지감(智鑑) - 금왕상불(金王相佛)
    • 7남 : 등연(等演) - 금왕행불(金王行佛)
    • 8남 : 주순(柱淳) - 금왕향불(金王香佛)
    • 9남 : 정영(淨英) - 금왕성불(金王性佛)
    • 10남 : 계영(戒英) - 금왕공불(金王空佛)
    • 장녀 : 영안공주(永安公主) - 태사 배열문(裴烈文)의 처
      • 외손 : 배숙(裴肅)
    • 차녀 : 태자 석구광(昔仇光)의 처
      • 외손녀 : 마정부인(摩貞夫人), 김알지(金閼智)의 처
  • 처남 : 장유화상(長遊和尙) 그가 가야에 불교를 전파했다 한다. 다른 이름은 보옥선인(寶玉仙人)
  • 사돈 : 탈해 이사금(脫解尼師今)

 

시조(始祖)는 김수로왕(金首露王)이다.

가락국(駕洛國)에는 본래(本來)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신천간, 오천간, 신귀간 등 아홉 촌장이 각 지방(地方)을 다스렸는데 서기 42년 3월에 구지봉(龜旨峰)에서 이상한소리가 났다. 아홉 촌장과 사람들이 올라가자 "산봉우리에 흙을파며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라. 만약(萬若) 머리를 내지 않으면 구어 먹겠다.'라고 하면서 춤을 추면 곧 임금을 맞이할 것이다."라고 하자 그대로 하였더니, 자줏빛 줄이 하늘에서 땅에 닿아 있었다. 그 끈의 끝에 붉은 보자기에 금으로 만든 상자가 싸여 있으므로 이것을 열어 보니 둥근 황금(黃金)알 여섯 개가 있었다.

이것을 아도간의 집으로 가져가자 다음날 이 알이 여섯 어린아이가 나왔는데, 제일먼저 나온 아이 이름을 김수로(金首露, 42~199.3.23)로 하고 그달 보름에 왕으로고 나라 이름을 가락(대가야)이라하고,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기 5가야(伽倻)의 임금이 되었다고 한다. - 이상은 "삼국유사" 중에서 -

그중 먼저 나온 수로(首露)는 금알에서 나왔다 하여 성(性)을 김(金)으로 하였다. - 이상은 "개황력(開皇曆)" 중에서 -

이 수로왕(首露王)을 시조(始祖)로 하는 성씨(姓氏)가 바로 김해김씨(金海金氏)이다. 김해는 가락국(駕洛國)의 고도로서 지명(地名)도 여러 가지로 변했으나 고려(高麗) 충선왕(忠宣王) 때 김해(金海)부가 설치(設置)됨으로써 본관(本貫)을 김해(金海)로 하였으며 가락김씨(駕洛金氏)라 고도 불리 우고 있다.

수로왕(首露王)이 즉위(卽位) 7년에 아유타국(현재 인도 중부지방(中部地方)의 고대국가)의 공주(公主)인 허황옥(許黃玉, 33~189.3.1)을 왕비(王妃)로 맞이하여 10남 2녀를 낳았는데 맏아들은 김씨(金氏)로 왕통(王統)을 잇고 두 아들은 왕비(王妃)의 간곡한 요청(要請)으로 왕비(王妃)의 성인 허씨(許氏)인 (태인허씨(泰仁許氏))를 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일곱 아들은 불가(佛家)에 귀화(歸化)하여 하동 7불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허씨(許氏)에서 갈라져 나온 인천이씨(仁川李氏)가 있으며 세 성씨(姓氏)가 다 같은 혈족(血族)이라며 종친회(宗親會)도 '가락중앙종친회(駕洛中央宗親會)'로 하였다.

김해 김씨(金海 金氏)의 중시조(中始祖)는 수로왕(首露王)의 12세손(世孫)인 김유신(金庾信) 장군(將軍)이다. 김유신(金庾信)은 가락국(駕洛國) 마지막 왕인 구형왕(仇衡王)의 증손(曾孫)자이며 무열왕(武烈王)의 딸 지소 부인(智炤夫人)과 혼인(婚姻)하였다. 할아버지는 신라(新羅)의 장군(將軍)이자 각간(角干)인 김무력(金武力, 구형왕(仇衡王)의 막내 아들)이고, 아버지는 당대(當代)의 이름난 장군(將軍)인 김서현(金舒玄), 어머니는 진흥왕(眞興王)의 동생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萬明)이다.


2. 세계도

 

1
김수로왕
金首露王
 
                                     
                   
2
도왕
道王
  2
허씨
許氏
  2
하동칠불
河東七佛
 
         
3
성왕
成王
 
         
4
덕왕
德王
 
         
5
명왕
明王
 
         
6
신왕
神王
 
         
7
혜왕
惠王
 
         
8
장왕
莊王
 
         
9
숙왕
肅王
   
                             
                 
10
양왕
讓王
          10
김탈지
金脫知
 
                                     
                   
11
김세종
金世宗
  11
김무력
金武力
  11
김무득
金武得
금릉 김씨 시조
 
                   
12
김솔우
金率友
  12
김서현
金舒玄
 
                                                                                     
                                                             
        13
흥무대왕
興武大王
김유신
金庾信
                                  13
김흠순
金欽純
  13
김보희
金寶姬
  13
문명왕후
文明王后
 
                                                               
                                       
        14
김삼광
金三光
  14
김원술
金元述
진주 김씨 시조
  14
김원정
金元貞
  14
김장이
金長耳
  14
김군승
金軍勝
  14
김반굴
金盤屈
 
                                                               
         
        15
김윤중
金允中
  15
김윤문
金允文
  15
김선
                  15
김영윤
金令胤
 
                                   
        16
김장청
金長淸
          16
김암
金巖
 
                             
         
        17
김웅원
金雄元
  17
김웅윤
金雄允
 
                 
        18
김경주
金擎柱
 
                             
         
        19
김성해
金成海
  19
김성대
金成垈
 
                 
        20
김정철
金挺喆
 
                             
         
        21
김수윤
金琇胤
  21
김옥윤
金玉胤
 
                             
         
        22
김천수
金天授
  22
김천여
金天與
 
                 
        23
김상좌
金商佐
 
                 
        24
김호
金浩
 
                 
        25
김화제
金華齊
 
                 
        26
김진유
金振酉
 
                                     
                   
        27
김승의
金承意
  27
김계의
金繼意
  27
김진의
金進意
 
                 
        28
김천정
金天精
 
                 
        29
김항령
金恒齡
 
                 
        30
김수성
金洙聖
 
                                     
                   
        31
김상흠
金商欽
  31
김상현
金商賢
  31
김상인
金商寅
 
                 
        32
김성우
金成雨
 
                 
        33
김일서
金一曙
 
                             
         
        34
김광국
金匡國
  34
김안국
金安國
 
                 
        35
김종백
金宗栢
 
                 
        36
김수
金繡
 
                 
        37
김이탁
金以琢
 
                             
         
        38
김서천
金瑞天
  38
김서지
金瑞地
 
                 
        39
김양철
金陽喆
 
                 
        40
김시추
金是秋
 
                             
         
        41
김진국
金鎭國
  41
김정국
金定國
 
                 
        42
김규상
金奎祥
 
                 
        43
김도협
金道浹
 
                             
         
        44
김탕우
金湯雨
  44
김상우
金商雨
 
                 
        45
김만서
金萬瑞
 
                 
        46
김사맹
金師孟
 
                 
        47
김상주
金相宙
 
                             
         
        48
김방직
金邦直
  48
김용직
金龍直
 
                           
        49
김익섬
金益銛
  49
김관
金管
판도판서공파
(삼현파)
 
                 
        50
김주국
金柱國
 
                                     
                   
        51
김절경
金晢卿
  51
김목경
金牧卿
금녕군파
(경 파)
  51
김익경
金益卿
감무공파
(사군파)
 

 

3. 분파와 인물

  • 경파(京派)[금녕군파(金寧君派)] - 김목경(金牧卿)
    • 참판공파(參判公派): 김영견(金永堅)
    • 횡성공파(橫城公派): 김영서(金永瑞)
    • 안경공파(安敬公派): 김영정(金永貞)
    • 석성공파(石城公派): 김영순(金永純)
    • 호참공파(戶參公派): 김진서(金震敍)
    • 참찬공파(參贊公派): 김달문(金達門)
    • 봉상공파(奉常公派): 김현문(金顯門)
    • 밀직사공파(密直使公派): 김창문(金昌門)
    • 문간공파(文簡公派): 김저(金著)
    • 밀직공파(密直公派): 김수(金秀)
    •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 김란(金蘭)
  • 사군파(四君派)[감무공파(監務公派)] - 김익경(金益卿)
    • 생원공파(生員公派): 김련(金鍊)
    • 도총관공파(都摠管公派): 김추(金錘)
    • 생원공파(生員公派): 김구(金銶)
    • 찬성공파(贊成公派): 김석(金錫)
    • 상서공파(尙書公派): 김감(金鑑)
    • 공간공파(恭簡公派): 김조(金銚)
 
신라
  • 김무력(金武力): 가야국 제10대 구형왕(仇衡王)의 셋쩨 왕자. 신라 신주군주(新州軍主)ㆍ각간(角干). 관산성 전투 승리하였다.
  • 김서현(金舒玄): 신라 대량주총관(大良州總管)ㆍ각간(角干)
  • 김유신(金庾信): 삼국 통일을 이끈 명장. 신라 태대각간(太大角干). 사후 흥무대왕(興武大王)에 추존되었다.
  • 김흠순(金欽純): 신라 대당 총관(大幢摠管). 삼국 통일의 공신이다.
  • 김삼광(金三光): 신라의 대당 군사외교가이다.
  • 김반굴(金盤屈): 신라 무열왕 때의 화랑이다. 황산벌 전투에서 홀로 적진에 뛰어들어 전사하였다.
  • 김시득(金施得): 신라 문무왕 때 수군지휘관. 기벌포(伎伐浦)에서 설인귀(薛仁貴)의 당군을 격퇴하였다.
  • 김원술(金元述): 매소성(買肖城)에서 당군과 전투에서 승전을 이끈 장수이다.
  • 김영윤(金令胤): 신라 신문왕 때 장군. 고구려 잔적(殘賊) 보덕성(報德城)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황금서당보기감(黃衿誓幢步騎監)으로 토벌하다 장렬히 전사하였다.
  • 김암(金巖): 신라 중대의 무관·방술가(方術家).
  • 김웅원(金雄元): 완산주도독(完山州都督). 순천장군으로 당나라 이사도(李師道)의 난과 김헌창(金憲昌)의 난을 평정한 장군.
  • 김천수(金天授): 신라 효공왕 11년에 시중(侍中)으로 당에 파견되어 황소의 난을 만나 전사하였다. 사후 대각간(大角干)에 봉했다.

고려

  • 김상좌(金商佐):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를 개국하고 삼중대광(1품관)를 지냈다.
  • 김호(金浩): 한림학사ㆍ좌간의대부(정4품)ㆍ대학사(종2품) 역임. 101세 장수
  • 김진유(金振酉): 광정대부ㆍ도첨의중찬ㆍ수문전대제학ㆍ판전리사사ㆍ세자사 역임. 광종이 과거제 시험담당관을 승려 혜거(惠居)를 임명하자 반대했지만 왕이 듣지 않아 금마저에 은거했다.
  • 김승의(金承意): 검교신호위상장군(撿校神虎衛上將軍). 승려 혜거를 쫓아내려했으나 파직 당했다.
  • 김천정(金天精): 벼슬은 병부상서를 지냈으며, 거란에 가서 화친을 청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 김택정(金澤精): 삼중대광ㆍ문하시중
  • 김항령(金恒齡): 검교신호위상장군(撿校神虎衛上將軍)으로 여진족과의 전투에 참전하였고 태평산에 은거하였다.
  • 김수성(金洙聖): 벼슬은 호부상서를 지냈으며, 강감찬(姜邯贊) 장군과 함께 여진족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 김상흠(金商欽): 고려 현종 때에 대사성(大司成). 최치원(崔致遠) 문창후(文昌候)에 봉하고 최치원의 부인을 선성묘에 모시라는 상소를 올리고 이후에 금주백(金州伯)에 봉해졌고 대제학이 되었다.
  • 김경신(金敬臣): 충렬왕 때 진변총관부군총관(鎭邊總管部軍總管)을 지냈다.
  • 김원현(金元鉉): 충렬왕 때 광정대부 첨의평리 상호군 영부사(匡靖大夫僉議評理上護軍領府事)을, 충선왕 때 양산방어사(梁山防禦使)로서 왜적(倭賊)을 물리친 공으로 양산춘추원(梁山春秋園) 장충단(奬忠壇)에 삼조의열(三朝義烈)로 배향
  • 김수(金繡): 검교신용호위상장군(檢校神龍虎衛上將軍)으로 왕의 밀유(密諭)로 이자겸(李資謙)을 영광으로 유배시켰다.
  • 김이탁(金以琢): 고려 의종 때 정중부(鄭仲夫)가 난을 일으켜 사대부를 모조리 살해해 시체가 길거리에 가득 차자 시신을 수습하기를 청하다 정중부 일당에게 살해 당했다.
  • 김서천(金瑞天): 경대승(慶大升) 장군과 함께 정중부를 죽여 부친의 원수를 갚았다.
  • 김보(金普): 공민왕 때 수종공신, 좌시중을 지낸 문신.
  • 김유(金庾) : 공민왕 때 강릉도병마사(江陵道兵馬使)가 되어 홍건적을 대파하여 이듬해 서울을 수복한 공으로 이등 공신, 김용(金鏞)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일등 공신이 되었다.
  • 김관(金管): 판도판서를 역임하고 유학을 진흥하는데에 큰 역할을 하였다.
  • 김구(金球): 동덕보리공신(端誠守義同德輔理功臣)에 녹훈되며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 김만희(金萬希): 조선 개국 후 출사를 거부하고 제주에 유배 되어, 애월읍 곽지리에 은거한 절신(節臣).[10]
  • 김방려(金方勵): 판종부사(判宗簿事). 정몽주(鄭夢周)와 이인임의 친원 정책에 반대하다가 김해 퇴은에 유배되었다. 위화도 회군 때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웠다.
  • 김탁(金琢): 고려 문하시중. 최유의 난을 평정한 공민왕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 김선(金璇): 고려 공민왕 때 공을 세워 장사군(長沙君)에 봉해졌다.
  • 김저(金佇): 시중 최영(崔瑩)의 생질. 폐왕 우왕을 만나 이성계를 살해하라는 부탁을 받고, 이성계의 집에 잠입하여 암살하려다 실패해 ‘김저의 옥사’가 일어났다.

조선

  • 김조(金銚): 세종 때 집현전수찬을 거쳐 예조판서에 올랐으며, 직제학에 역임할 때 장영실(蔣英實)과 함께 간의대, 자격루, 혼천의 등을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 김수연(金壽延): 조선 전기 장군으로 김종서 등과 더불어 6진을 개척하고 계유정난으로 단종이 유배지 영월에서 비참하게 죽자 6일간 단식 끝에 자결한 충신이다.
  • 김극검(金克儉): 조선전기 호조참판, 동지중추부사, 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 김계금(金係錦): 조선전기 지평을 거쳐 의성현령 역임하였다. 사육신 사건으로 벼슬을 그만 두고 낙향하였다.
  • 김자정(金自貞): 조선 전기의 문신. 단종·세조·성종·연산군 대에 여러 관직을 지냈으며, 중국어에 능통하여 외교업무를 능숙하게 수행하였다.
  • 김극일(金克一): 어릴 때부터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님을 섬겼으며 어머니의 종기를 입으로 빨아 낫게 해 드리고, 아버지 병의 원인을 찾기 위해 변을 맛보았다고 전해진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시묘살이를 할 때 호랑이가 옆을 지켰다. 사시(私諡)는 절효(節孝)이다.
  • 김일손(金馹孫): 춘추관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에, 이극돈의 비행(非行)을 그대로 쓰고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실었다고 하여 무오사화 때에 처형되었다.
  • 김구(金龜): 의정부좌참찬(議政府左參贊)에 이르렀으나 이극돈(李克墩)의 무고로 창원에 유배되었다.
  • 김대유(金大有): 기묘사화가 일어나 칠원현감(漆原縣監)을 마지막 벼슬로 사직하고 청도의 운문산에 들어갔다.
  • 김예직(金禮直): 임진왜란 때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했으며,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역임했다.
  • 김수원(金秀源): 임진왜란때 선조를 호종하여 호성공신이 되고 내금위장 등을 지냈으며 공조판서에 추증되었다.
  • 김련광(金鍊光): 회양부사(淮陽府使)로 있던 중 임진왜란을 때 성문을 방어하다 왜적에게 피살되었다.
  • 김경서(金景瑞): 임진왜란 때 평양성 탈환에 큰 공을 세웠고, 명나라의 요청으로 강홍립(姜弘立)과 후금 정벌 위해 출전하여 심하(深河)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 김축(金軸):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솔과 후학을 거느리고 김천일(金千鎰)의 막하에서 활약하다 이듬해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하였다.
  • 김극희(金克禧): 명사수로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막하에서 전공을 세우고, 한산도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 김현성(金玄成): 광해군 때 시·서·화에 두루 능하였는데, 그림보다는 글씨에 뛰어났으며 특히 시에 능하였다고 한다. 대표작으로 이충무공수군대첩비문(李忠武公水軍大捷碑文)이 있다.
  • 김완(金完): 임진왜란 때에 남원대첩에 전공을 세우고, 이괄의 난을 평정할 때 벽동(碧潼)의 성(城)을 사수한 명장이다.
  • 김여준(金汝峻):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볼모로 가는 왕자들을 호종한 무신. 중국 심양(瀋陽)에 갈 때 옥하관(玉河關)에서 「월명비안(月明飛雁)」의 시를 읊었다.
  • 김덕승(金德承): 여러 벼슬을 거쳐 목사(牧使)에 이르렀는데, 경사(經史) ·운서(韻書)를 연구하여 중국어에 능통했고, 글씨와 그림에도 능했다.
  • 김우항(金宇杭): 조선 숙종 때 우의정. 신임사화 때에 화를 입었다.
  • 김홍도(金弘道): 조선 영조 때 풍속화의 대가. 도화서 화원이 된 후 왕세손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정조의 어진(御眞)을 그렸다.
  • 김만덕(金萬德): 제주도의 거상
  • 김대건(金大建): 우리나라 최초의 가톨릭교회 신부. 마카오에서 신학을 배우고 조선에서 선교활동을 하다 1846년 병오박해로 순교하였다.

근현대사

 

4. 김해김씨의 분포

대한민국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성씨이며, 김씨 중에서도 가장 많은 41.7%를 차지하고 있다. 2000년 서울 81만 5천 783명, 부산 40만 7천 41명, 대구 19만 9천 252명, 인천 20만 7천 736명, 광주 14만 8천 736명, 대전 9만 6천 887명, 울산 10만 4천 627명, 경기 71만 8천 661명, 강원 10만 7천 612명, 충북 8만 6천 978명, 충남 14만 151명, 전북 17만 3천 712명, 전남 26만 8천 525명경북 23만 7천 826명, 경남 35만 12명제주 6만 1천 395명이다. 부산과 경남지역에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다. 2000년 4,124,934명, 2015년 4,456,700명으로 조사되었다.

구분

가야 수로왕계 김해 김씨 선김(先金)과 신라 김렴계 김해 김씨는 김해 김씨 후김(後金) 또는 김녕 김씨(金寧 金氏)로 구분한다. 또는 사성 김해 김씨는 우록 김씨(友鹿金氏)라고 한다.

동조 이성 이본

허씨 - 가락국 수로왕비 허황옥(許黃玉)을 연원으로 삼는 성씨다. 본관은 김해(金海), 양천(陽川), 태인(泰仁), 하양(河陽) 등이 있다.

인천 이씨 - 허황옥(許黃玉)의 23세손 아찬(阿湌) 허기(許奇)를 득성조라고 하고 상서좌복야 이허겸(李許謙)을 시조로 하며 태인 허씨에서 분관되었다.

 

동조 동성 이본

금릉 김씨 - 가락국 구형왕(仇衡王)의 셋째 아들 김무득(金武得)을 시조로 한다.

진주 김씨 - 김유신(金庾信)의 차남 김원술(金元述)을 시조로 한다.

무장 김씨 - 김수로왕의 56세손인 충절공(忠節公) 김선(金璇)을 시조로 한다. 일부 후손들은 김해김씨 장사군파로 칭하고 있다.

분적설

남양 김씨 - 김수로왕의 후예로 고려 의종 때 사람인 김적(金頔)을 시조로 한다.

웅천 김씨 - 김유신의 후예로 조선조에서 수의부위에 오른 김중재(金重材)를 일세조(一世祖)로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5.  2000년 전 허황옥의 신행길을 따라, 김해와 인도 우정의 상징

 

 

 

김해와 인도의 깊은 인연이 시작된 것은 2000년 전,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이 가야국의 김수로왕과 혼인을 결심하며 한국 땅에 첫 발을 내디뎠을 때입니다. 그 이후 김해와 인도는 오랜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잊히지 않는 유대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1999년, 인도의 아요디아 왕실 후손인 미쉬라 왕손 내외의 방한으로 두 나라의 인연이 다시 주목받았고, 이는 김해시와 아요디아시 간의 자매결연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결과, 인도 아요디아에 허황옥 기념공원이 조성되며 양국의 역사가 새롭게 조명되었습니다.

허황옥 기념공원은 아요디아의 중심을 흐르는 신성한 사라유 강변에 자리 잡았습니다. 허황옥과 김수로왕의 전설을 기리는 이 공원은,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제대로 관리되지 못한 채 녹슨 정문과 무성한 수풀만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빈민촌으로 둘러싸인 공원은 현지 주민들의 생계와도 별반 다르지 않은 방치된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하지만 김해와 인도의 우정을 상징하는 이 공원을 재정비하여 지역 사회에 긍정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인도의 유피 주정부와 김해시는 허황옥 기념공원을 중심으로 주변 지역을 특산품 생산 및 판매지구로 개발하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 개발이 완성되면 기념공원은 단순한 상징적 장소를 넘어, 빈민촌 주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삶의 터전이 될 것입니다. 이를 통해 허황옥의 이야기는 2000년을 뛰어넘어 오늘날에도 지역 사회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는 전설로 거듭날 것입니다.

한편, 김해시도 아요디아의 인연을 이어받아 한국의 불암동 서낙동강변에 대규모 인도풍 허왕후 기념공원 조성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2만 3,000㎡의 광활한 부지에 조성될 이 공원은 국·도·지방비 210억 원을 투입해 내년 말 준공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허황옥의 신행길을 중심으로 한 역사적 스토리텔링을 통해 국제적인 관광명소로 발전시키려는 포부를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이 공원 내에는 인도문화교류관도 함께 세워져, 한국과 인도의 문화적 교류를 더욱 강화할 예정입니다. 이 교류관은 가야테마파크 인도관에 보관 중이던 희귀 인도 유물들을 한데 모아 전시할 예정이며, 인도 정부도 다양한 유물 기증을 약속했습니다. 또한 2019년 인도 모디 총리가 방한 당시 김해시에 선물한 석가모니 보리수 묘목도 교류관에 옮겨져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것입니다.

허황옥 기념공원이 조성되는 김해시는 이 프로젝트가 단순히 두 나라의 과거를 기념하는 장소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걸쳐 양국의 우정을 이어가는 가교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김해 홍태용 시장은 “허황옥의 신행길을 국제적 관광 상품화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게 하고, 김해와 인도의 오랜 우정을 바탕으로 한 감동적인 스토리를 전달할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그 포부를 밝혔습니다.

이로써 김해와 아요디아, 두 도시는 20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허황옥과 김수로왕의 이야기를 되새기며, 양국의 문화와 역사가 현재의 상호 교류와 협력으로 연결되는 상징적 장소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6. 허왕후의 진짜 고향, 인도 북부가 아니라 남부 해안? 

 

허왕후 묘 "보주태후허씨릉"
구산동 소재

서기 48년에 가야국의 시조 김수로왕에게 시집온 허황옥(許黃玉, 32~189)의 고향은 과연 어디일까? 지금까지 알려진 대로 인도 북부 갠지스강 중류의 아요디야(Ayodhya)가 아니라 남동부 해안의 같은 이름을 가진 아요디야 쿠빰(Ayodhya Kuppam)일 가능성이 더욱 높다는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허왕후가 “나는 인도 아유타국(阿踰陀國) 출신의 공주”라고 말한 바에 따라, 그동안 많은 학자들이 아유타국의 뿌리를 찾아왔고, 결국 인도 최대 주인 우타르프라데시(Uttar Pradesh)주의 아요디야를 허왕후의 출신지로 확정하게 되었다. 이는 아유타와 발음이 유사한 지명 가운데 아요디야가 가장 흡사했기 때문이다. 아요디야는 ‘싸움이 없는 곳’이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Sanskrit, 힌디어의 뿌리)로, 당시에는 그 발음이 ‘아요다(Ayodhya)’였다.

이에 따라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 가문 등이 주도하여 아요디야 지역에 ‘가락공원’을 조성하였고, 경남 김해시는 아요디야와 자매결연을 맺고 허왕후의 유적지를 기념하는 사업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인도에는 아요디야라는 지명이 두 곳 더 존재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중 하나는 인도 남동부 타밀나두주(州)의 해안가 마을 아요디야 쿠빰이다. 이러한 사실은 허왕후의 출신지가 인도 북부의 아요디야가 아니라, 남부의 아요디야 쿠빰일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허황옥이 인도 북부의 아요디야에서 출발했다면, 배를 타고 갠지스강을 거슬러 내려가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약 2000년 전의 항해 기술로는 강을 따라 동아시아로 향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반면, 남부 아요디야 쿠빰은 벵골만과 인접한 해안가 마을로, 바닷길을 이용해 동아시아로 항해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다. 또한, 《삼국유사》에 언급된 파사석탑(婆娑石塔)은 주로 인도 동부 해안에서 발견되는 특수한 돌로, 허왕후가 이 지역 출신임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여겨진다.

허왕후가 가야에서 사용한 언어와 타밀어의 유사성도 주목할 만하다. 타밀어와 우리말은 수백 개의 단어에서 유사성이 있으며, 어순도 비슷하다. 허왕후가 자신의 고향 말을 가야 사람들에게 전해준 것이 우리말에 남았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러한 언어적 유사성은 허왕후가 인도 남부 타밀나두 출신일 수 있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또한, 드라비다족(Dravidian)은 모계사회를 중심으로 형성된 문화였으며, 허왕후가 자신의 아들 중 두 명에게 허씨 성을 부여한 것도 이러한 전통의 영향으로 해석될 수 있다. 허왕후가 김해에 도착했을 때 지닌 비단과 장신구들도 아요디야 쿠빰 인근 지역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다양한 근거를 통해 필자는 허왕후의 출신지가 인도 북부의 아요디야가 아니라 남부의 아요디야 쿠빰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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