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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주변 돌아보기/세상만사 世上萬事

칠불사 七佛寺

by 경청 2024.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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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불사

 

칠불사(七佛寺)는 가야불교(伽倻佛敎)의 발상지(發祥地)이자, 문수보살(文殊菩薩)의 상주도량(常住道場)이며, 동국제일선원(東國第一禪院)이다. 또한 해동계맥(海東系脈)을 수립한 율도량(律道場)이자, 동다(東茶)를 중흥한 차도량(茶道場)이며, 거문고(玄琴)를 전승한 현악(絃樂)의 도량이기도 하다.

칠불사는 지리산(智異山)의 중심봉인 반야봉(般若峰, 1,732m)의 남쪽 800m 고지에 위치하고 있다. 신라(新羅) 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지은 『옥룡자결(玉龍子訣)』에 따르면, 지리산 칠불사는 와우형(臥牛形)의 명당(明堂)으로, 제일의 양택(陽宅)이라 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퇴락한 가람(伽藍)을 서산대사(西山大師)와 부휴대사(浮休大師)가 중수하였다. 그 후 1800년에 큰 화재가 발생하여 보광전(普光殿), 약사전(藥師殿), 미타전(彌陀殿), 벽안당(亞字房), 칠불각(七佛閣), 설선당(說禪堂), 보설루(普說樓), 요사채(寮舍) 등 10여 동의 건물이 전소되었으나, 대은율사(大隱律師)와 금담율사(金潭律師)에 의해 모두 복구되었다. 그러나 6·25 전쟁(韓戰)으로 인해 1951년 1월경 다시 전소되었고, 27년간 폐허로 남아 있었다. 이후 제월통광(霽月通光) 스님이 1978년부터 약 15년에 걸쳐 대웅전(大雄殿), 문수전(文殊殿), 아자방(亞字房), 운상원(雲上院), 설선당, 보설루, 원음각(圓音閣), 요사, 영지(影池), 일주문(一柱門) 등을 복원하고 선다원(禪茶院), 사적비(史蹟碑), 다신탑비(茶神塔碑) 등을 세웠다.

칠불사는 1세기경 가락국(駕洛國) 시조 김수로왕(金首露王)의 일곱 왕자가 외숙인 범승(梵僧) 장유보옥(長遊寶玉) 화상(和尙)을 따라 이곳에서 동시 성불(成佛)한 것을 기념하여 김수로왕이 국력으로 창건한 사찰로, 가야불교의 발상지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가락국기(駕洛國記)에 따르면, 수로왕은 서기 42년 화생(化生)하였으며, 남해바다를 통해 가락국에 도착한 인도(印度) 아유타국(阿踰陀國) 허황옥(許黃玉) 공주를 왕비로 맞아 10남 2녀를 두었다. 장남은 왕위를 계승하였고, 둘째와 셋째 왕자는 어머니의 성을 이어받아 김해 허씨(許氏)의 시조가 되었으며, 나머지 일곱 왕자는 장유화상(長遊和尙)을 따라 출가하였다. 그들은 장유화상의 지도 아래 가야산에서 3년간 수행한 후, 의령 수도산과 사천 와룡산 등을 거쳐 서기 101년에 지리산 반야봉 아래 운상원(雲上院)을 짓고 정진한 지 2년 만에 모두 성불하였다.

칠불(七佛)의 명호는 금왕광불(金王光佛), 금왕당불(金王幢佛), 금왕상불(金王相佛), 금왕행불(金王行佛), 금왕향불(金王香佛), 금왕성불(金王性佛), 금왕공불(金王空佛)이다. 이 칠왕자의 성불로 인해 칠불사라 불리게 되었다. 칠불사 경내의 영지(影池)와 인근 지역의 명칭을 통해서도 칠불사가 가야불교의 성지임을 알 수 있다. 영지는 일곱 왕자의 그림자가 나타났다는 연못이다.

수로왕 부부가 출가한 일곱 왕자를 만나기 위해 이곳을 방문했을 때, 장유화상은 “왕자들은 이미 출가하여 수행 중이라 상면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꼭 보고 싶으시면 절 아래 연못에 왕자들의 그림자가 비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수로왕 부부가 연못을 보니 과연 일곱 왕자의 그림자가 나타났고, 이를 보고 기뻐하며 돌아갔다고 한다. 이로 인해 그 연못을 '영지'라 부르게 되었다. 또한, 칠불사 인근 마을의 이름인 범왕(凡王) 마을과 대비(大妃) 마을도 칠불사가 가야불교의 성지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범왕리라는 명칭은 김수로왕이 칠왕자를 만나기 위해 임시 궁궐을 지어 머물렀기 때문에 유래되었다. 대비마을은 허황후가 아들을 만나기 위해 머물렀던 곳에서 비롯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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