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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돌아보기/한국역사 韓國歷史

한국전쟁 참전국

by 경청 2024. 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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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은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국가가 단 하나의 국가를 위해 지원한 전쟁이며, 유엔이 그 한 국가를 위해 정규 군을 모아서 싸운 유일한 사례이다.

 

유엔 상임이사국은 2차 세계대전 5대 승전국(미국, 소련, 영국, 중국, 프랑스)으로 구성된 기구였고, 다시는 1차대전을 막겠다고 만들었으나 제국주의에 휘말리며 의미를 잃어버린 국제연맹처럼 되지 말자는 취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도 당시 공산주의 세력인 소련과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미국, 영국, 중국(당시 국민당), 프랑스는 일단 2차대전 때는 한편이었으나 전후 이들이 모두 화합하는 건 불가능했으며, 중국(국민당)이 2차 국공내전에서 패배해 국부천대로 인해 힘을 잃고 수십년 후 유엔에서 축출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 후 유엔은 현재까지도 보이듯이 상임이사국 중에서 제1세계권 미국/영국/프랑스 진영과 제2세계권 중국/러시아 진영이 계속 대립하여 의견의 합의가 일어나기 힘들게 되었다. 그 탓에 유엔군은 한국전쟁 이후 양측의 이해관계 탓에 몇 차례의 평화유지군 외에는 정규 군으로서 파병해볼 일이 거의 없었다. 한국 전쟁에 대해서 유엔군을 파병하는 사안에 대해서는 그당시 현 중국(공산당)이 유엔 상임이사국이 아니어서 권한이 없었고, 소련이 반대가 아닌 기권을 해서 결국 유엔이 한국을 구하기 위해 정식 군대를 결성하여 파병하여 처음이자 마지막인 유엔의 정규 군대 기록으로 남았다.

 

그 후로는 소련은 자국의 마음에 안 드는 사안에 대해선 기권이 아니라 꼬박꼬박 적극적으로 반대를 하기 시작했고, 중국(공산당)은 결국 현 대만(중국 국민당)을 대신해 UN에 들어오며 현재처럼 만장일치가 나오기 힘든 구도가 구성되었다. 특히나 1948년에 만들어진 대한민국은 전쟁 이후 전쟁 없는 평화의 세계를 지향하는 유엔이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선거도 지원한 만큼, 유엔이 기껏 힘껏 밀어줘서 만들어진 대한민국이 바로 공산 북한의 습격을 받아 멸망하는 것을 방치하는 것은 국제연맹 때처럼 기껏 생성한 유엔을 다시 무의미하게 만드는 일이기도 했으므로 미국을 비롯한 국가들은 유엔군으로서 의미 있게 개입했다.

저 당시 한국을 지원한 국가들 중 이후 공산국가가 되어 관계가 틀어진 국가들도 있었는데, 일단 쿠바의 경우 공산주의 혁명으로 정권이 바뀐 뒤 대한민국을 적으로 간주했고, 월남 역시 북베트남에 의해 공산통일당해 사라졌고, 공산화된 베트남과의 관계는 1990년대까지 냉랭했었다. 에티오피아 역시 공산 혁명이 일어나 황제가 살해당하고 파병부대원들도 핍박당했지만 정권이 무너지고 관계를 회복했다.

부산광역시에 있는 UN기념공원에 2,300명의 각국 UN군 전사자가 있다.

2012년 5월에 6.25 전쟁 당시 참전국 명단이 새로이 공개되었는데 정확히는 63개국으로 밝혀졌으며, 기존 참전국과 의료지원국을 제외하고 물자지원 및 물자지원 의사 및 표명 등을 밝혔던 국가가 추가로 공개되었다.

 

 

 

 

참전국

미국은 가장 많은 병력을 파병하였고 또한 희생하였으며, 사실상 유엔군은 미군이 대부분을 이끄는 형태였다. 유엔군이 도착하기 이전에 미군이 한국과 경상도까지 밀리면서도 버텨내 서로 피를 흘리며 싸운 경험은 현재의 한미동맹에도 양국이 강조하는 사례이다.[10] 여담으로 한국 전쟁은 미국이 여태껏 치른 전쟁 중 미군이 5번째로 많이 사망한 전쟁이다. 1위는 남북전쟁, 2위는 2차 세계대전, 3위는 1차 세계대전, 4위는 베트남 전쟁, 5위가 바로 한국 전쟁이다.

튀르키예는 공화인민당과 군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당시 아드난 멘데레스 총리의 결단으로 파병을 결정했다.

타흐신 야즈즈 소장의 지휘하에 미국과 영국, 캐나다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병했다. 2002년 월드컵 당시에도 튀르키예는 한국에게서 혈맹국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스 왕국은 6.25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공산주의자들과의 대규모 내전을 두 차례 치렀으며 영국과 미국의 도움으로 내전에서 승리해 발칸 반도 전역이 공산화되는 와중에 가까스로 공산화를 면했다. 내전의 결과 확고한 반공 국가가 된 그리스는 6.25 전쟁이 터지자 기꺼이 군대를 파병했다.

튀르키예와 그리스가 머나먼 극동의 소국에서 벌어진 전쟁에 만 명이 넘는 군대를 보내 성심껏 싸우게 한 데에는 국제평화의 이상에 대한 수호정신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그 못지 않게 자국이 처한 정치적 상황에 대한 계산이 배경에 깔려 있었다. 냉전 문서에 나오는 나토와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세력도를 보면 알겠지만 튀르키예와 그리스는 서유럽과 지리적으로 분리되어 있었고 공산화된 발칸 반도와 캅카스에 둘러쌓여 공산화 위협을 받고 있었다. 게다가 이들은 트루먼 독트린의 직접 당사국으로서 미국의 참전 요청을 거부하기 힘든 상황이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은 필사적으로 나토에 가입하고자 했고 이러한 의지를 한국전쟁 참전으로 표명한 것이었다. 덕분에 이들은 1952년 나토에 가입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1990년대에 대거 소련으로부터 겨우 독립한 공산권의 동유럽 국가들 역시 러시아에 대한 위협과 미국의 편에 서겠다는 확실한 의지로 인해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에 적극적으로 미국을 도와 개입했다. 

호주가 UN군의 일원으로 최초로 참전한 전쟁이 6.25 전쟁이다.

필리핀 제3공화국은 미국, 영국에 이어 세번째로 상륙하였으며, 필리핀 前대통령 피델 라모스는 6.25 전쟁 참전용사이다.

태국은 한국 전쟁에 육, 해, 공군을 모두 파견한 8개국 중 하나이다.

네덜란드는 과거 식민지였던 남아메리카 수리남(1975년 독립) 등 속령지역 용사들도 동원하여 참전했다.

콜롬비아는 라틴 아메리카 국가 중 유일하게 전투 병력을 파병한 국가이다.

사실 콜롬비아 말고도 전투 병력을 파견한 국가가 있는데 바로 멕시코다. 1943년 발효되어 1952년까지 유지되었던 '멕시코와 미국 간 상대국 거주 자국민 병역에 관한 협정'으로 미국에 거주하던 멕시코 국적자들이 미군에 징집되어 참전했다. 멕시코는 약 10만 명에 달하는 군인들이 참전했지만 미군으로 분류되어 표기됐기 때문에 많은 이들은 이를 알지 못하고 있다. 미국 군인들 중 3.5%는 멕시코계 군인이었다.

뉴질랜드는 마오리족까지 참전했다. 이들이 퍼뜨린 노래가 바로 Pokarekare ana(한국어 번역명은 '연가')

에티오피아 제국은 하일레 셀라시에 1세 황제가 특별히 자신의 친위대를 내줘서 파병했다. 단 그 당시 에티오피아에 제대로 된 상비군이 친위대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공산화 이후에는 흑역사로 치부해 참전자들을 박대했다.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는 벨기에-룩셈부르크 연합으로 파병되었다. 룩셈부르크는 80명 남짓한 소규모 병력을 파견했지만 이는 룩셈부르크군 자체가 1000명 내외의 소규모 군대인 점을 감안하면 상당한 병력이다. 또한 병력 대비 사상자의 비율은 전체 유엔군 중 가장 높았다.

프랑스군 중에서 랄프 몽클라르 중장은 이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자신의 계급을 스스로 중령으로 강등시키고 참전했다. 하지만 미군으로부터 그대로 중장 대우를 받았다.

남아프리카 연방은 아프리카의 잊어져버린 6.25 참전국이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과 국내 매체들도 에티오피아만을 아프리카 유일의 6.25 전쟁 참전국으로 기억한다. 남아공이 에티오피아와 달리 6.25 참전국에서 빨리 잊어진 것은 당시에 영연방 국가였고, 다른 아프리카의 국가들과 다르게 소수의 네덜란드, 영국계 백인 이주민들이 국민 대다수의 아프리카 흑인들을 배제, 억압하며 20세기 말까지 백인 통치를 자행하는 등 사실상 백인 국가로 취급받던 나라였던 점이 크다. 대한민국 정부 역시 남아공이 참전국임에도 불구하고 이 아파르트헤이트에 항의하는 뜻에서 공식 수교를 단절했을 정도였다. 또한 전쟁 때 파병 인원의 규모도 작았고 공군 병력과 12명의 육군 병력만 파견한 것도 주요 이유인 듯하다. 하지만 826명 중 36명이 전사하고 8명이 포로가 될 정도로 치열하게 싸웠다. 그러나 정권이 교체된 이후로는 쉬쉬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백인 정권이 미국, 영국의 똘마니로써 참전했다고 보는 시각이라 한국전쟁 참전행사도 열리지 않고 있다.

사실 대만도 3만 명대의 병력을 파견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었다고 한다. 만약 이 계획이 실행되었다면 영국에 이어 3번째로 많은 군대를 파병한 나라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때 미국은 대만의 참전이 중공군의 개입[12]으로 인한 3차 세계대전이 터질 가능성, 중공군이 대만에 빈집털이를 시전하는 것 등을 두려워해 대만을 뜯어말려 물자 지원에 그쳤다고 한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 중 하나인데, 스페인도 당시 유럽서 가장 큰 규모의 파병을 지원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당시 스페인은 파시스트 독재자 프랑코가 지배하고 있던 시기로 국제적으로 왕따당하던 시절이라 웃기지 말라면서 무시당했다. 애초에 프랑코가 파병 지원을 시도한 이유도 이 외교적 고립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의도가 있었다. 스페인은 의료지원이라도 하려고 했으나 네덜란드와 벨기에가 극구 반대하여 무산됐고 대신에 똑같이 최대 규모 파병을 자처한 그리스튀르키예에서 전투병력이 갔다.
 
또 하나의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은 상기돼 있는 멕시코인, 멕시코계 미국인 외에 미국령 푸에르토리코 출신이 엄청나게 많이 참전하고 전사했다는 것이다. 6.25 전쟁에 참전한 미군 병력 약 180만 명 중 약 18만 명이 히스패닉 계열인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 중 멕시코계 병력은 약 12만 명, 미국령 푸에르토리코 출신 병력은 약 6만 명이었다고 한다.

1940년대 후반 미국, 영국, 캐나다 등으로 이민 간 아일랜드인들도 해당 국가 소속으로 참전하여 160명 이상 전사했으며, 당시 네덜란드령이었던 수리남에서는 수리남인 병사들이 네덜란드군 소속으로, 벨기에령 콩고에서는 콩고인 병사들이 벨기에군 소속으로 참전한 것으로 전해진다.

약 800명이 참전한 것으로 알려진 북아메리카의 원주민 나바호족 역시 미군 소속으로 참전했다.#

우크라이나계 미국인들이 미군 소속으로 참전한 기록이 있다고 우크라이나 국립 군사역사박물관에 소개돼있다. #

약 4000여 명의 유대인이 미군이나 영국군 소속으로 참전했다.

 

의료지원국

  • 스웨덴
    병원 / 부대: 스웨덴 적십자 야전병원[13] (Svenska Röda Korset-sjukhuset)
    입국: 1950년 9월
    출국: 1957년 4월
  • 인도
    병원 / 부대: 인도 육군 제60공수야전의무대 (Indian Army 60th Parachute Field Ambulance)
    입국: 1950년 11월
    출국: 1954년 2월
  • 덴마크
    병원 / 부대: 덴마크 적십자 병원선 '유틀란디아 호'
    입국: 1951년 3월
    출국: 1953년 8월
  • 노르웨이
    병원 / 부대: 노르웨이 육군 이동외과병원 (Norwegian Mobile Army Surgical Hospital, NORMASH)
    입국: 1951년 6월
    출국: 1954년 11월
  • 이탈리아
    병원 / 부대: 이탈리아 제68적십자병원
    입국: 1951년 11월
    출국: 1955년 1월
    당시 UN 비회원국 자격으로 지원했다. 당시 2차대전에 추축국으로 참전해 패배한 과거 때문에 UN에 가입하지 못한 상황이었고, 이에 이탈리아의 패전 추축국 이미지를 지우고 자유 세계의 일원이 됐음을 강조하기 위해 참전을 결정했다.
  • 독일

    병원 / 부대: 서독 적십자 병원

    입국: 1954년 1월 (선발대) / 1954년 2월 (본대)

    출국: 1959년 4월

    당시 서독은 2차대전에 추축국으로 참전한 과거에서 비롯한 전쟁에 대한 공포와 동독 및 소련과의 관계 때문에 참전에 반대하는 내부 여론이 있었으나, 일본이탈리아와 마찬가지로 2차대전 패전 이후 추축국의 이미지를 씻어내고 자유세계의 일원이 됐음을 알리기 위해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의 결정 아래 UN 비회원국 자격으로 지원했다.[14] 서독 정부는 1953년 4월 80여명 규모의 의료 지원 파견 의사를 유엔군에 전달하였고 휴전 이후인 1954년 5월부터 약 5년간 의료 지원 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의료 지원 활동 시점이 휴전 이후였다는 이유로 의료 지원국으로 인정받지 못했으나 2018년에야 대한민국 국방부는 공식적으로 독일을 6번째 의료 지원국으로 인정했다. 이에 따라 전쟁기념관이나 UN 평화 기념관 등지에서 내용 수정 작업이 이루어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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