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구촌 돌아보기/인물탐방 人物探訪

도요토미 히데요시 (豊臣秀吉)

by 경청 2024. 9. 12.
728x90
반응형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덴분 6년 음력 2월 6일(1537년 3월 17일) ~ 게이초 3년 음력 8월 18일(1598년 9월 18일))는 일본 전국시대(戦国時代)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安土桃山時代)에 활약한 무장이자 다이묘(大名)였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와 함께 전국 3영걸(三英傑)로 불린다. 임진왜란(壬辰倭乱)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는 도요토미(豊臣) 성을 받기 전에 하시바(羽柴) 성을 사용하였다. 그의 가신(家臣)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의 어머니 이토(伊藤)는 히데요시의 6촌 여동생이었다.

개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와리국(尾張国) 나카무라(中村)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에는 오다 노부나가를 섬기며 출세했으며,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으로 죽은 후, 주고쿠(中国) 지방에서 군대를 이끌고 교토로 돌아와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를 야마자키 전투(山崎の戦い)에서 격파하고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그의 사업을 계승하였다.

오사카성(大阪城)을 축성하고 관백(関白)과 태정대신(太政大臣)이라는 직책을 맡아 일본을 통일하는 데 성공했다. 태합검지(太閤検地)와 가타나가리(刀狩)를 통해 일본 내의 사회를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으나, 임진왜란을 일으키는 과오도 범했다. 임진왜란 중에는 자신의 조카이자 관백인 도요토미 히데쓰구(豊臣秀次)를 숙청하고, 후계자를 자신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로 하였으나 곧 죽음을 맞이하였다.

출신과 초기 생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와리국 나카무라에서 기노시타 야에몬(木下弥右衛門)과 나카(なか)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생년은 덴분 5년(1536년)이라는 설도 있지만, 최근에는 덴분 6년(1537년)설이 유력하다. 히데요시의 아버지 야에몬은 여러 설이 있으나 목수 또는 대장장이였다는 설도 있다.

 

어린 시절 히데요시는 양아버지 지쿠아미(竹阿弥)와의 관계가 좋지 않아 집을 떠나 무사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전해진다. 히데요시는 7세 때 고메이지(光明寺)에 입적하였으나 곧 떠났고, 15세에 방랑 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신분은 매우 천했기 때문에 후에 일본을 통일했음에도 불구하고 쇼군(将軍)이라는 직위를 얻지 못했다.

오다 가신 시절과 출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처음에 오다 노부나가의 하급 가신으로 시작하여 여러 공을 세우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의 재능은 노부나가에게 인정받아 급속히 출세하였다. 그는 기발한 아이디어와 끈기 있는 성실함으로 노부나가의 신뢰를 얻었으며, 전투에서 공을 세워 영지를 받기도 했다.

 

덴쇼 9년(1581년)에는 주고쿠 지방을 공략하는 임무를 맡아 하리마국(播磨国)과 비젠국(備前国)을 정복했다. 1582년 혼노지의 변 이후, 주군인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하자 히데요시는 곧바로 교토로 회군하여 아케치 미쓰히데를 격파하였다.

일본 통일과 정책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일본을 통일하였고, 일본 역사상 유일한 평민 출신으로 나라를 통치하는 자리에 올랐다. 그는 태합검지와 가타나가리와 같은 정책을 통해 전국을 통일하고 사회를 안정시켰다. 그러나 후계자 문제로 인해 자신의 조카 도요토미 히데쓰구를 숙청하고, 자신의 아들 히데요리를 후계자로 지명하였다.

임진왜란과 말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략하여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전쟁 초반에는 승세를 잡았으나 명나라와 조선의 저항으로 전쟁은 장기화되었고, 결국 실패로 끝났다. 전쟁 중 히데요시는 건강이 악화되었으며, 게이초 3년(1598년)에 오사카성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사후 도요토미 정권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붕괴되었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