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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 돌아보기/인물탐방 人物探訪

도쿠가와 이에야스 (徳川家康)

by 경청 2024.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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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막부(江戸幕府)의 초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는 도요토미 가문(豊臣家)의 지배기였던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安土桃山時代)를 종식시키고, 피폐해진 정국을 수습한 인물로,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직전까지 지속된 근세 일본의 정치·경제·문화의 기반을 확립하였다. 그는 사실상 센고쿠 시대(戦国時代)의 실질적인 승리자이자, 마지막 천하인(天下人)으로 평가받는다.

 

일본에서의 평가

 

시대에 따라 다르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현대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이다.

 

근대 일본에서는 존왕사상(尊王思想)이 강해 천황(天皇)의 권위를 축소한 이에야스는 매우 비판받았다. 특히 에도 막부가 붕괴되고 메이지 유신이 진행되면서, 황실을 홀대하고 권력을 움켜쥔 인물로 비열하거나 간사한 이미지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천황가와 귀족 쿠게(公家)의 권력을 제한하였으나, 대접은 잘 했다는 평가도 있다.

 

태평양 전쟁 이후, 천황에 대한 절대적 존경심이 감소하고 실용적인 사고방식이 자리 잡으면서, 이에야스의 정치적 실용주의가 다시 조명받기 시작했다. 특히 전후 일본의 국력 증강에 기여한 에도 막부의 안정적 통치 덕에, 그의 견실한 정치력이 높이 평가되었다.

 

이에야스는 많은 인물을 포용하려는 온건한 정치 방식을 택하였으며, 전투에서도 패배한 다이묘들을 살려주는 등 관용적이었다. 예를 들어,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 이후 서군의 주요 인물인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을 처형한 반면, 대부분의 서군 다이묘는 생존할 수 있게 했다.

또한 이에야스는 자신이 패권을 쥔 후에도 가신들에게 고루 보상을 나누며, 특정 가문이 지나치게 강해지지 않도록 권력을 분산시켰다. 그 결과 일본 전토(全土)의 약 1/4을 직할령으로 두어 막부 권력을 견고히 했다.

야마오카 소하치(山岡荘八)의 역사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에서 그가 철저한 평화주의자로 묘사된 것도 그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강화했다. 또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 같은 인물에 비해 화제성은 적지만, 많은 위기에도 불구하고 천하를 얻은 인물로 롤모델이 되기도 한다.

 

한국에서의 평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는 반대 노선을 취하며 조선과의 관계를 중시했다. 임진왜란(壬辰倭乱) 직후 조선은 이에야스를 부정적으로 보았으나, 에도 막부는 도요토미 정권의 조선 침략을 강하게 비판하며 조선과의 관계 회복에 노력했다.

 

기유약조(己酉約条)를 체결하며 쓰시마 도주(対馬島主)를 중재자로 내세워 조선과 무역을 독점하는 등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였다. 이에야스는 조선 침략에 소극적이었고, 이로 인해 조선과의 관계는 상대적으로 우호적으로 유지되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実録)》에 따르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지략이 뛰어나 강자들을 제압하는 데 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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