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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 돌아보기/인물탐방 人物探訪

맹자 (孟子)

by 경청 2024.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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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孟子, 병음: Mèngzǐ, 라틴어: Mencius, 기원전 372년? ~ 기원전 289년?)는 공자(孔子)의 사상을 이어 발전시킨 유학자(儒學者)이다.

 

전국 시대(戰國時代) 추나라(鄒國) 사람으로, 이름은 가(軻)이고, 자(字)는 자여(子輿) 또는 자거(子車), 자거(子居), 자전(子展) 등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공자를 숭상하였으며, 공자의 사상을 발전시켜 유학을 후세에 전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생애

맹자의 생몰 연대는 정확하지 않지만, 그는 공자가 죽은 후 약 100년 뒤에 추나라, 즉 현재 산둥성(山東省) 쩌우청(鄒城) 지역에서 태어났다. 맹자는 본래 노나라(魯國) 환공(桓公)의 서장자(庶長子)였던 경보(慶父, 기원전 ? ~ 기원전 660년)의 후손이었다. 경보의 아들 오(敖, 기원전 ? ~ 기원전 613년)에 이르러 가문을 새로 세웠으며, 이때부터 맹씨(孟氏) 또는 맹손(孟孫), 중손(仲孫) 씨로 불리게 되었다. 기원전 408년, 제나라(齊國)가 맹씨의 식읍(食邑)이었던 성성(郕城)을 공격하자 맹씨 일가는 흩어졌고, 그 일부가 노나라에서 추나라로 옮겨가면서 맹자는 그곳에서 태어났다.

 

맹자가 활동한 시기는 대체로 기원전 4세기 전반기로 추정된다. 그의 어머니 급씨(伋氏)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로 유명하다. 이는 맹자의 교육을 위해 세 번이나 이사했다는 일화로, 후한(後漢) 시대 학자 유향(劉向)이 지은 《열녀전(列女傳)》에 등장하지만, 실제로는 사실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 중론이다. 맹자는 공자의 고향인 노나라로 가서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문하에서 육경(六經)을 배웠다.

 

맹자는 묵자(墨子)와 양주(楊朱)의 사상과 경쟁하며 유가(儒家) 사상을 확립했다. 40세 이후로는 인정(仁政)과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주창하며 천하를 유람하였고, 법가(法家)나 종횡가(縱橫家)의 사상과 타협하지 않았다. 60세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한때 제나라에 체류하던 중, 인접국인 연나라에서 자지(子之)가 난을 일으키자 이를 제 선왕(齊宣王)에게 보고하여 자지의 난을 진압하게 하기도 하였다.

맹자의 사상

맹자의 저서로는 《맹자(孟子)》가 있다. 《맹자》 7편은 만년에 저술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그의 제자들이 편찬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맹자의 사상은 하늘(天)에 대한 숭경(崇敬)의 정념을 바탕으로 한다. 맹자는 하늘이 인간을 포함한 만물을 창조하고, 그 피조물들을 지배하는 영원불변의 법칙을 정했다고 보았다. 인간은 하늘의 법칙에 따라 살아야 하며, 인간의 본성(本性)은 선(善)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를 성선설(性善說)이라 한다.

 

맹자는 인간의 마음속에 인(仁)·의(義)·예(禮)·지(智)의 사덕(四德)이 존재한다고 하였다. 인은 '측은지심(惻隱之心)', 의는 '수오지심(羞惡之心)', 예는 '사양지심(辭讓之心)', 지는 '시비지심(是非之心)'으로 설명된다. 이 사덕은 인간이 본성적으로 지닌 덕목으로, 이를 통해 인간의 선한 본성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맹자의 왕도론(王道論)은 정치적으로 하늘의 의지를 구현하고, 민생(民生)의 안정을 추구하는 정치를 강조한다. 맹자는 군주가 도덕적 지배를 통해 백성의 지지를 받으면 천하가 통일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공자의 사상을 더욱 발전시킨 것이다.

맹자는 또한 역성혁명(易姓革命) 사상을 강조하였다. 그는 은나라(殷) 주왕(紂王)이 폭정을 일삼았기에, 주나라(周) 무왕(武王)이 이를 타도한 것은 정당하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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