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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 돌아보기/인물탐방 人物探訪

오다 노부나가( 織田信長)

by 경청 2024.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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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덴분 3년 음력 5월 12일(1534년 6월 23일) ~ 덴쇼 10년 음력 6월 2일(1582년 6월 21일))는 일본 센고쿠 시대(戦国時代)의 뛰어난 다이묘(大名) 중 한 명이다. 그는 "天下人"으로 불리며,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와 함께 일본 통일을 이룬 삼영걸(三英傑)로 손꼽힌다.

집안 배경

오다 노부나가는 자신의 뿌리를 헤이시(平氏)라 자처했으나, 일부 역사 연구가들에 따르면 에치젠 후지와라씨(越前藤原氏)의 후손이거나, 인베씨(忌部氏)의 후예라는 주장도 있다. 그가 속한 오다 가문(織田家)은 원래 오와리(尾張) 지역의 지방관(守護大名)인 시바 가문(斯波家)의 신하였으나, 이마가와 가문(今川家)의 침공 이후 시바 가문은 약화되었고, 오다 가문이 실권을 잡았다.

 

노부나가는 오다 가문의 방계 출신으로, 그가 속한 단조노추 가문(弾正忠家)은 기요스 삼봉행(清洲三奉行) 중에서도 지위가 낮은 가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오다 노부히데(織田信秀)는 본가와 주군인 시바 가문을 제압하고 센고쿠 다이묘로 성장했다.

소년 시절

1534년(덴분 3년) 음력 5월 12일, 노부나가는 오다 노부히데의 적장자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도타 고젠(土田御前)으로, 적장자인 그는 아명(幼名)인 깃포시(吉法師)와 나고야성(名古屋城)을 물려받았다. 소년 시절의 노부나가는 종종 상식을 벗어난 행동으로 ‘오와리의 대바보(尾張の大うつけ)’라고 불렸다. 그러나 그는 조총(鉄砲)에 관심을 가졌으며, 농민들과도 곧잘 어울리며 통치자로서의 자질을 보였다.

 

1546년(덴분 15년) 성인식을 치르고 가즈사노스케(上総介)라는 관직명을 받았다. 2년 후, 미노(美濃)의 다이묘 사이토 도산(斎藤道三)의 딸 키쵸(帰蝶)와 정략결혼을 하여 가문을 결속했다.

집안 분쟁과 오와리 통일

1551년(덴분 20년), 아버지 노부히데가 사망하자 가문의 실권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그의 기이한 행동과 장례식장에서의 무례로 인해 가문 내 반발이 심해졌다. 1554년(덴분 23년), 오다 가문의 본가인 오다 노부토모(織田信友)는 노부나가의 동생 노부유키(織田信行)를 옹립하려 했으나, 노부나가는 이를 저지하고 노부토모를 처형하였다.

 

1559년(에이로쿠 2년), 노부나가는 오와리 국의 완전한 지배자가 되었고, 같은 해 교토(京都)로 상경하여 막부 장군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義輝)를 만났다.

오케하자마 전투와 기요스 동맹

1560년(에이로쿠 3년),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가 4만 대군을 이끌고 오와리로 침공하자, 노부나가는 오케하자마(桶狭間)에서 적의 본진을 기습하여 이마가와를 무찔렀다. 이 승리로 인해 그의 명성은 크게 떨쳤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동맹을 맺어(기요스 동맹) 미카와(三河) 지역을 안정시켰다.

미노 공략과 천하포무(天下布武)

사이토 도산의 죽음 이후, 노부나가는 미노 지역을 정복하고, 거처를 기후(岐阜)로 옮겼다. 그는 "天下布武"라는 네 글자가 새겨진 인장을 사용하여 천하통일의 야망을 공식화했다.

혼노지의 변

1582년(덴쇼 10년), 노부나가는 혼노지(本能寺)에서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배신으로 인해 공격받아 자결하였다. 그의 죽음은 일본 역사에서 큰 충격을 주었으며, 이 사건은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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